국회..정치..그리고 사회..

[노무현&이광재]명분을 따른 외톨이

세미가 2009. 7. 3. 17:34

 <이광재 의원의 우통수의 꿈 中에서..>

<좌측 두번째 이광재 의원님> 

 

정치는 명분 싸움이다.
명분은 정치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고 정치인의 생명과 같다. 명분론은 유가사상에서 나왔다.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정치인의 도덕성은 가장 우선해야 할 덕목이다.

노무현 의원이 즐겨 하는 말이 있다.
“실리가 커도 명분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나는 그 말 한 마디로 노무현 의원의 됨됨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손해 볼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러나 명분을 지키기 위해 감수한다.

나는 5공 비리 청문회가 끝난 뒤 보좌관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노무현 의원이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면서 나는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초선의원이지만 이미 노무현 의원은 큰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런 인물을 보좌할 능력이 과연 나에게 있는가. 수십 번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보다 더 경륜과 역량이 있는 참모가 보좌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사표를 썼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제주도로 갔다. 고등학교 때 무전여행을 떠나 한 달간 머물던 곳이라 정이 많이 들어서 마음의 안정을 찾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건이 터졌다. 노무현 의원이 1988년 울산 현대중공업에 가서 강연을 했다. 그 자리에서 노동자들이 핍박받는 사실을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그는 그것을 사회적 의제로 부각시켰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여 1993년 초 의원직 사퇴를 선언해버렸다. 뒷일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충청도로 떠났다.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말 한 적이 두어 번 정도 더 있었다. 노무현 의원은 후원금을 모으는 재주가 없었다. 그 과정이 구차하고 자존심이 상해서 정치를 그만하고 싶다는 속내를 간곡하게 참모들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나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사표를 써놓고도 노무현 의원에게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한 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1990년 1월 10일경 3당 합당 움직임이 가시화됐다. 노무현 의원은 강하게 반발했다. 민주당을 빼고 민정당, 통일민주당, 공산당 등 3당이 합치는 것은 호남을 고립시키는 패거리 정치의 표본이라는 것이었다.

노무현 의원은 급히 ‘3당 합당 불가론’ 에 관한 인쇄물 제작에 돌입했다. 1월 19일 밤, 대의원들에게 그 인쇄물을 보낼 봉투작업까지 마쳤다. 바로 그 다음 날인 20일, 여당은 전격적으로 3당 합당을 발표했다.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 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자당’을 만들었다. 노무현 의원은 곧 바로 합당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3당 합당은 명분이 없다. 손해를 본다 해도 합류할 수 없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명분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강력한 의지였다.

노무현 의원은 참으로 결단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당시 여당에 합류하지 않고 작은 민주당에 남게 된 국회의원은 8명밖에 안 되었다. 1991년에 dj가 이끄는 신민당과 작은 민주당이 합당하여 ‘민주당’을 만들게 되었다. 노무현 의원은 협상대표로 참여했고 통일 민주당에서 대변인으로 전격 발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