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정치..그리고 사회..

[노무현대통령&이광재의원]소신에서 냄새가 난다.

세미가 2009. 6. 26. 09:30

<우통수의 꿈에 나온 이광재의원님과 노무현 대통령님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배짱에는 두 가지가 있다. 뒤에서 받쳐주는 것 없이 큰소리치는 배짱. 목소리는 작지만 소신을 가지고 관찰하는 배짱. 진짜 무서운 배짱은 후자이다. 소신이 있어야 어려운 일을 한다. 난관에 부딪쳐도 극복해 낸다. 소신은 일의 원동력이다.

1988년 4월 감옥에서 나와서 한달쯤 지났을 때다. 연세대에서 로타렉스 서클활동을 할 때 만났던 최영군 선배가 내게 전화가 왔다. 그는 당시 민통련에서 일하고 있었다.
“너 국회의원 보좌관 해보지 않을래?”
최 선배의 말에 나는 망설였다.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이다. 쉬면서 인생을 다시 설계하고 싶었다.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선배가 다시 말했다.
“부산에서 당선된 초선의원인데,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그러면서 최 선배는 부산에 사는 시인 임정남 씨가 특별히 부탁하는 가리고 덧붙었다.

임정남 시인 역시 민통령 일을 하고 있었고, 연세대 선배이기도 했다. 만난 적은 없지만, 그의 시는 읽은 적이 있었다. 부인은 동아대학교 교수인 강은교 시인이었다. 문단에서 부부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었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명동에서 임정남 시인을 만났다. 노무현 국회의원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헤어졌다. 나는 이왕 시내에 나온 김에 명동성당에 갔다. 그때 서울대에 다니던 조성만이란 학생이 명동성당 위에서 할복을시도하고 아래로 떨어져 절망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봤다. 나는 도리질 쳤다.
‘이럴 수는 없다. 정말 이럴 수는 없다.’

며칠 후 나는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으로 나가 노무현을 만났다.
“저 이광재입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노무현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이니 좀 도와주십시오.”
노무현 의원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첫인상이 겸손하고 소탈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솔직해 보였다. 초선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노무현 의원에게서 먼저 느낀 것은 사람 냄새였다. 냄새에도 악취가 있고 향취가 있다. 인간다움이 배어 있는 체취, 나는 노의원에게서 그 향취를 맡았다.

나는 노무현 의원의 최초 보좌관이 되기로 결심했다. 대면하고 몇 마디 주고받은 것으로 결정이 났다. 그 다음은 이력서는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소신있는 의원이니만큼 나도 소신 있는 보좌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보좌관이 되어 처음 접한 일은 ‘문송연 사건’ 이었다. 문송연은 열일곱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다 갑자기 죽었다. 당시 노동 단체에서는 수은 중독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노 의원과 나는 진상 조사를 위해 공장에 갔다. 현장을 너무 깨끗하게 정리해놓아 물증을 잡을 수가 없었다. 국회의원이 현장 조사를 나온다고 하자 공장에서 미리 손을 썼다.

물증이 죌만한 것을 치워버리고 시멘트를 발라 흔적을 없애버렸다.
나는 공장에서 나올 때 간부들 몰래 문송연의 친구에게 내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었다. 곧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녹음기를 가지고 약속 장소로 나가 친구를 만났다. 그는 수은중독이 맞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문송연과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동료의 증언이었다. 녹취록은 충분히 증거 자료로소의 가치가 있었다. 노의원은 녹취록을 검찰에 보냈고, 검찰은 곧바로 수사에 들어갔다. 그 공장의 사장은 구속됐다. 문송연의 사체를 부검해본 결과 수은 중독으로 사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노무현 의원은 문송연 사건을 토대로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직업병 문제를 거론했다. 이때부터 직업병이 노동계의 화제로 떠올랐다. 사회 문제로 확대되면서 이와 관련된 노동자들의 소송이 잇달았다. 방송과 신문에서도 비중 있는 기사로 다루기 시작했다. 노 의원은 노동계의 새로운 스타로 등장했다.
노무현 의원은 노동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회의원도 전문성이 요구되는 때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이어 노동부 문서 수발 대장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뜻밖에 큰 것이 걸려들었다. 안기부 자금이었다. 그 자금이 노동부뿐 아니라 각 부처에 나뉘어져 비밀리에 관리되고 있는 것을 추적해냈다. 노무현 의원은 안기부 자금 문제를 국정감사에서 캐물었다. 증거자료로 노동부 문서를 제출했다. 그는 의정활동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노무현 의원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1988년 11월에 열린 5공 비리 청문회였다. 나는 청문회 자료를 준비하면서 밤잠을 안 잤다. 자료 분석이 가장 중요했다. 비밀은 자료의 행간 속에 숨어 있다.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추리적인 상상력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먼저 가설을 세우고 나서 거기에 맞춰 자료를 분석에 들어갔다. 분석 결과 가치 있는 자료를 토대로 다시 질의 사항을 체크해나갔다.

노무현 의원 역시 자료 조사팀과 밤을 새우며 청문회를 준비했다. 나는 자료를 a. b. c 등급으로 분류하고 청문회 증인들의 도표를 그려놓았다. 자료와 도표를 보고 노의원은 머릿속에 다시 설계도를 그렸다. 그 설계도를 토대로 추적의 실마리를 찾아나갔다. 청문회에서 증인을 꼼짝 못하게 코너로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은 가설을 충족시키는자료와 그것을 만든 설계도의 정확성 때문이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을 설치한 후 집요한 질문공세를 퍼부었던 것이다.

보좌진이 자료를 만들면 노무현 의원은 종이에 다시 나름대로의 설계도를 그렸다. 그리고 그것을 요약 정리해주면 그는 밤을 새워서 외우는 것 같았다. 우리 보좌진은 그의 성실성과 예리함, 그리고 명석한 두뇌에 혀를 내둘렀다.

이러한 체계적인 작업으로 노무현 의원은 청문회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청문회 당시 국민의 격려 전화가 쇄도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의정활동을 가장 잘한 국회의원으로 노무현 의원이 선정 되었다. 초선의원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안은 셈이었다.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일에 대해 몇 가지 원칙을 가지게 되었다.
첫째, 책상머리에서 일하지 않는다. 반드시 현장을 확인 한다.

둘째, 성급하게 시작하지 않는다. 기획을 먼저 세우고 뼈대를 만들 어 진행한다.
셋째,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말을 충분히 듣는다.
넷째, 열정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는 이원칙을 준수했다. 또 거목 아래 잡초가 되기 싫었다. 나는 의정 보좌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노무현 의원의 보좌진은 인기를 느렸다. 다른 의원들이 서로 스카우트하려고 나섰다. 스물네 살에 이룬 것치고는 멋진 결과였다.

청문회 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