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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재 의원 '우통수의 꿈' 중에서>
큰 것과 작은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소인은 큰것과 작은 것을 구별하지 못해 작은 것을 큰것이라고 우긴다.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은 많다. 명장은 큰 전쟁과 작은 전투를 구분한다.
졸장은작은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힘을 소모하며 정작 큰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상대보다 많은 군사를 가지고도 패한다.
노무현 의원은 1992년 3당 합당을 심판하는 기치를 내걸고 부산동구에서 출마했다.
그리고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때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전투에서는 져도 되지만 전쟁에서는 이겨야 한다."
나는 처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알고 보니 '전투'는 부산 동구 출마였고, '전쟁'은 1992년 12월에 치를 대선을 의미 했다.
아무튼 1992년 제14대 총선 때 노무현 의원은 부산 동구에서 여당의 허삼수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1988년 13대 총선 때는 허삼수 후보를 물리치고 초선 의워이 된 그였다.
나는 그 두 선거에서 지원 유세를 나왔던 YS의 말을 기억한다.
제13대 총선에서 그는 통일민주당 당수로 노무현 후보의 지원유세를 나와 당시 여당의 허삼수 후보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총잡이는 서부로, 인권 변호사는 국회로 보냅시다 !"
그런데 제 14대 총선에서 YS는3당 합당 후 여당이 되어 허삼수 후보 지원 유세를 나와 이렇게 외쳤다.
"허삼수는 충직한 군인이었고, 내가 앞으로 중히 쓸 인물입니다."
부산은 YS의 텃밥이었다. 그의 말은 유권자를 현혹했다.
그해 말에 있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여당 후보를 챙기겠다는 뜻이었다.
YS는 한 사람을 두고 그때그때의입장에 따라 상반되는 말을 했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사람은 신뢰할 수 없다.
그러나 YS는 1992년 제 14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DJ를 누루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 의원은 민주당 청년특위 위원장과 '물결 유세단' 단장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그
러나 '전투에서 져도 전쟁에서 이긴다' 라던 그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대선이 끝나고 나서다. 노무현 의원은 선거 기간 동안 쓴 돈을 정확하게 영수증 처리했다.
남은 돈과 함께 당에 반납했다. 돌려주지 않고 다 섰다고 해도 의심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깨끗하게 되돌려 주라고 나에게 지시했다. 나는 그가 충직한 사람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그의 정직성을 다시 확인했다. 당에서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 하는 분위기였다.
노무현 의원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겠다고생각한 것이 바로 그때였다.
1992년 말 DJ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1993년 3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이 잡혀 있었다. 민주당은 8명의 최고위원을 뽑기로 결정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야당 사상 처음 실시되는 완전 자유 경선에 나가 당에서 기반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93년 초, 나는 노무현 의원이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기를 은근히 바랬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새 발판이 필요했다. 그는 지난 총선에서 낙선한 원외 지구당 위원장이었다.
당내에서의 힘도 약했다. 조직력도 갖추자 못했고 경선을 치를 돈도 없었다.
나는 일단 노무현 의원의 의중을 떠보기로 했다. 어느 날 청평으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 의원님. 이번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십시오. "
노의원은 앞만 바라본 채 말이 없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노심초사했다.
" 될까? "
노무현 의원이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 됩니다. 반드시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나는 갑자기 힘이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노의원도 내심 최고위원 경선 출마를 두고 고민 중에 있었다는 걸 ' 될까 ?' 라는 그 말 한 마디로 알아낼수 있었다.
"그래, 해보자 ! "
노무현 의원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총선에서 낙선한 노무현 의원이 최고위원에 도전한다고 하자 당내에서는 그 용기가 가상하다는 분위기였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동교동계와 이기택 총재 쪽에서는 이기택, 권노갑, 한광옥, 김정길 카드를 내세웠다.
일종의 연합 구도를 만들어 전당대회에 임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일각에서는 아무래도 노무현 의원은 최고위원에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예상했다.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대선 때DJ
를 위한 선거유세를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당원들은 그의 충정을 알것이다. 그 당원들은 보도 도전하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우리 운동원들은 대의원 집집마다 찾아갔다. 해남의 땅끝마을까지 쫒아다녔다. 운동원에게 감동해서 표를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당대회 날, 모두의 예상을 깨고 노무현 의원은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원외가 아니라 당 지도부의 일원이 됐다. 최연소 최고위원으로 그의 입지도 굳힐 수 있게 됐다.
당시 염동연 선배의도움이 컸다. 연청조직이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염동연 선배와의 인연이 싹텄다.
노무현 의원이 최고위원에 당선된 직후, 나는 미국으로 한 달간 신혼여행을 떠났다.
신혼여행 동안 내내 노의원의 미래를 생각했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까, 심사숙고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전과 조직이었다. 노무현 의원은 현역의원을 상대로 정치를해서는 승부가 나지 않았다고 보고 있었다.
내 생각도 같았다. 지방자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지방의원 대부분이 지구당 간부다. 그들은 나중에 경선에서 유력한 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미래의 정치 자원을 발굴 육성해야 한다. 이들은 제3의 정치 세력으로 등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당내에 조직이 없던 노무현 의원은 지지세력을 위한 기반 건설이 필수적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안희정 씨를 만났다. 그리고 계획을 말했다. 노무현 의원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보자며 의기투합했다. 일종의
' 도원결의 ' 인 셈이다. 서울 갈현동의 후줄근한 술집에서 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지방자치연구소 설립 계획을 밝혔다. 모두들 동의했다.
이때부터 안희정, 정윤재 서갑원, 황이수 등이 연구소 운영에 나섰다.
' 지방자치실무연구소 ' 는 전국의 시청, 구청 지방의원들에게 의정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방자치 실무교육을 시키는 곳이었다.
내가 연구소 설립에 발벗고 나섰을때, 노무현 의원은 의미 있는 일이니 한번 해보자고 적극 지원했다.
1992년 대선 직후부터 이미 설계한 바가 있었다. 이제부터 낮은 포복으로 가자는 생각이었다.
그것이 연구소 개설을 추진한 원동력이었다.
나는 우선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지역신문 기자들에게 각 지방자치 요원들 중 실적이 뛰어난 사람들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들은 연구소 이사로 영입해 지방의원들을 교육하는 강사진으로 활용했다. 전국적인 조직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는 연수생들에게 연수비를 받았다.
각 지방의원들의 호응도가 매우 높았다. 우리는 연구소를 거쳐간 이들 지방의원들을 조직의 핵심으로 활용할 구상이었다.
연구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지방의원 200여 명, 단체장 30여 명이 연구소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전국적인 팀워크가 구성된 것이다.
2002년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당 내외 인사들이 하나같이 노무현 호보는 조직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내심 자신했다.
바로 그 연구소가 뿌린 씨앗이 열매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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