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통수의 꿈 중에서 "국민이 킹메이커다.">
값진 실패가 있고 값싼 승리가 있다.
실패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사람은 드물다.
실패는 승리의 디딤돌이다. 쓰라린 맛을 보았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영호남의 지역 구도를 깨겠다고 했다.
그 의지를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다.
어느 날 노 의원은 핵심 참모들에게 밝혔다.
“말리지 마십시오. 나의 소신이자 정치적 결단입니다. 우리 부산으로 내려갑시다. 새천년민주당이 이제 지역 구도를 극복하고 전국 정당이 돼야 할 때입니다.”
참모진들은 당연히 반대했다. 정치 1번지 종로를 버리고 사지로 들어가자니!
참으로 황당하고 앞이 캄캄했다. 우리는 논쟁을 거듭했다.
결론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노무현 의원은 다시 참모회의에서 못을 박았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내 결심은 확고합니다. 국회의원 1석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믿고 다라주세요. 소모적인 논쟁은 하지 맙시다.”
나는 회의 직후 혼자 중얼거렸다.
‘참으로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그는 젊은 우리보다 더 원칙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다른 사람이 생각할 동안 지도자는 결단하고 실천한다.
그 모습에 감동했지만 한편 야속하기도 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를 고생길로 이끈 것이다.
우리는 사지에서 등지를 틀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다. 따르는 길밖에 없었다.
1999년 말 노무현 의원은 종로구 지역구를 포기하고 부산 출마를 결단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모든 이들이 경악했다.
그동안 표를 다져놓은 지역구를 떠나 다른 지역구로 옮긴다는 것도 모험이지만,
한나라당 표밭인 부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겠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 아니겠는가.
노무현 의원은 2000년 제16대 총선 때 부산 북강서을에서 출마했다.
그가 이 총선에서 당선되면 그 상장성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지역구도가 깨지는 것은 물론이고 부산 전 지역구를 석권하고 있는 한나라당에게 뼈아픈 상처를 안기는 셈이 된다. 여당과 야당의 자존심을 건 한 판의 힘 겨루기였다.
부산에서 이미 낙선의 고배를 마셔봤다. 노무현 의원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도 확고했다.
이번만은 승리를 이끌어보자고 참모들은 선거 전략을 철저하게 짜나갔다.
선거 열기가 뜨거웠다. 언론에서 매일 실시하는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후보가 상대 후보를 조금 앞서는 것으로 나왔다. 과연 지역구도가 깨지는 것인가.
언론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변이라도 생각한 방송사는 방송차량을 지구당에까지 급파했다. 그러나 선거가 진행되면서 나온 출구조사는 달랐다.
노무현 후보가 상대 후보에 뒤지고 있었다. 출구조사는 거의 정확했다.
개표 결과 이번에도 낙선이었다.
여론조사가 우세할 때는 사람들이 들끓었다.
선거에 지고 나자 사무실은 울음바다로 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은 텅 비었다.
사람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노 의원 집에서 그와 술을 한잔 나누었다.
숙소로 들어오면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어찌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물러설 곳이 있는가. 없다면 흔들리지 말자. 백척간두 진일보하자.’
선거 막바지 까지 우리는 기름을 짰다. 자금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선거 다음 날 나는 안희정 씨를 찾아가 말했다.
“비록 낙선했지만 유권자들에게 감사하다는 플랜카드를 붙이려고 하는데 어떡하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도 금세 알아들었다.
“우리, 대출을 받자.”
안희정 씨와 나는 급히 대출 받은 돈으로 부산 잔역에 플랜카드를 내걸었다.
‘부산 시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이것이 나와 안희정 씨가 약속한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대외적으로 공표한 최초의 일이었다. 물론 ‘이제부터 시작입니다’란 말의 진의를 아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우리는 이미 다음 대선을 기약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노무현 의원에게 인터넷 사이트에 ‘낙선의 변’을 싣자고 건의했다. 허락을 받아냈다. 나는 그가 한 말 중에서 뽑은 ‘농부는 발을 탓하지 않는다’를 제목으로 내세웠다. ‘낙선의 변’이 인터넷 사이트에 올랐다.
‘낙선의 변’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서 ‘바보 노무현’이란 타이틀로 다시 소개되었다. ‘노무현’이라는 이름 앞에 ‘바보’가 붙었다. 그는 낙선될 것이 명약관화인데도 불구하고 지역구를 옮겨 출마했다. 그리고 뻔한 낙선을 하면서 바보가 되었다. 그런데 그 ‘바보’는 조롱이 아니라 동정이었다. ‘소신 있는 정치인’ 이라는 칭찬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인터넷 사이트에 올린 ‘낙선의 변’에 댓글이 붙기 시작했고 하루 종일 폭주했다.
게다가 그날 하루에 그치지 않고 연일 지속되었다.
나중에는 ‘노무현을 살리자’ 라는 구호와 함께 ‘노사모’ 사이트까지 생겼다.
각 방송과 신문에도 노무현 의원의 낙선 인터뷰가 나가기 시작했다.
총 68회에 걸쳐 낙선자 인터뷰와 관련 기사가 소개되었다.
언론매체에서 낙선자에게 이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것은 유사 이래 처음 이었다.
노무현 의원은 <시사저널>과의 낙선자 인터뷰에서 최초로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대선 출마는 그와 참모들 사이에서만 오가는 암묵적인 의지였다. 이제 대선 출마가 언론에 정식 공개된 것이다.
노무현 의원이 대선 출마를 언급하자 주위 의견은 엇갈렸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하는 반응이 먼저 나왔다. 그러자 그를 키우고 살려 나가자는 여론이 덮었다.
“노무현을 살리자”라는 쪽으로 가는가 싶더니 잠차 “DJ는 노무현을 책임지라”는 방향으로 민심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해 8월 노무현 의원은 해양수산부 장관이 됐다. 돌이켜 보면 이때부터 국민이 ‘킹 메이커’노릇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국민은 낙선한 후보를 장관직에 올리도록 힘을 실어주었다. 대세라고 했던 이인제 후보를 무너뜨린 것은 국민 경선이었다. ‘반노’, ‘비노’ 로 만신창이가 된 노무현 후보를 부활하게 만든 것도 국민 여론조사였다. 대통령 자리에 가장 가까이 갔던 이회창 후보를 한 달 만에 밀어낸 것도 결국 국민의 힘이었다.
지도자를 선택하는 과정이 이와 같았으니 국민을 ‘킹메이커’라 부르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대선 기간 중 우리는 그 뜻을 받아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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