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정치..그리고 사회..

[노무현대통령&이광재의원] 한번 해봅시다.

세미가 2009. 8. 4. 09:54

 <이광재 의원의' 우통수의 꿈' 중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축하>

 

<젊은 시절 이광재의원>

 

 

큰 나무’ 가 되는 신화는 묘목을 심는 일에서 출발한다.
나는 정자의 ‘가죽나무 우화’를 좋아한다. 곧게 올라간 잘 생긴 나무 곁에 못 생긴 가죽나무가 서 있다. 잘 생긴 나무는 목수 눈에 금방 뛴다. 일찍 감치 재목감으로 잘려나간다. 못 생긴 가죽나무는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다. 저 홀로 들판을 지킨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아주 큰 나무가 된다. 그 큰나무는 큰 그늘을 드리워 나그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큰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시련을 견뎌내야 한다.
노무현 의원 앞에도 시련과 고난의 세월이 기다리고 이었다. 복병은 뜻하지 않은 곳에세 나타나는 법이다. 1995년 영국에서 돌아온 DJ가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었다. 민주당에 있던 호남 출신 국회의원들이 모두 그 당으로 가버렸다.

노무현 의원은 민주당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1995년 민주당 후보로 부산시장에 출마했다. 낙선이었다.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는 정치 1번지인 서울시 종로구에 출마했다. 다시 낙선했다. 이명박, 이종찬 후보 등과 겨루었다가 겨우 3위를 차지했다.

나는 낙심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조직력이 너무 약했다. 어느 누가 출마해도 낙선은 불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나는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다음선거를 위해 종로구에서 바람을 일으켜야 했다.

처가에서 내게 “이젠 먹고 살 궁리를 하라” 며 돈을 주었다.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배수의 진을 치기로 했다. 그 돈으로 종로구 청진동에 카페를 차렸다. 사무실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소꿉동무’라는 카페였다. 노 의원을 지지하던 한 유원자도 종로구 효자동에 ‘오시리스’라는 카페를 열었다. 우리는 종로에서 카페를 오가며 배수진을 친 셈이었다. 다음 총선에 대비하는 작전도 짰다. 노 의원의 변호사 사무실을 종로3가에 냈다. 그의 집도 영등포구 여의도동 여의도에서 종로구 명륜동으로 옮겼다.

노무현 의원은 1996년 야당 대통합을 위한 국민통합추진회의 활동을 했다. 그 결과 1997년에는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이 새정치국민회의와 대통합을 이루었다. 그는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를 맡게 되었다. 대선 때는 수도권 특별유세단(파란새유세단) 단장으로 다시 ‘DJ 대통령 만들기’ 에 전력투구했다.

1997년 야당 후보 DJ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1997년 대통령 취임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가 여당이 됐다. 노무현 의원은 마침 그해 종로구 보궐선거에 여당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1996년 총선 당시 부정선거가 법정 판결을 받으면서 이명박 의원이 의원직에서 물러나게 되자 보궐선거를 치르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행운이었다.

노무현 의원은 종로구 보궐선거에서 이겼다. 야당의 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다시국회의원배지를 거머쥐었다. 낙선과 낙선을 거듭한 끝에 얻은 승리였다.

종로구 보궐선거의 승리는 값진 것이었다. 한동안 정치의 그늘에 가려졌던 노무현의원이 햇빛가운데로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나중에 대통령 출마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면서 중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나는 안희정 씨와 약속한 “노무현 대통령으로 만들자” 라는 야심 찬 계획을 상기했다.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보궐선거에서 당선되고 나서 선거전을 치른 참모진이 모처럼 양평에서 모였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노무현 의원에게 차기 대통령 출마를 종용했다. 그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 끝에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번 해봅시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우리의 심장이 요동쳤다. 드디어 시작되는구나......
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