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프라이즈 / 이기명 / 2010-05-29) 미국이 얼마나 먼 곳인가. 자식과 함께 편하게 사는 자네가 얼마나 많은 생각 끝에 귀국을 결심하고 아들에게 어려운 말을 했겠나. 나이 먹으면 도리 없이 자식 눈치를 보게 되고 내 주장보다는 자식들 말에 따르는 게 속 편하다고 체념하고 사는 우리 늙은이들인데 자넨 역시 한가락하던 옛날 끼가 아직 살아 있어 부럽네, 물론 미국생활이 익숙하지도 않고 익숙할 수도 없겠지. 서울에서 매달 한 번씩 만나던 친구들도 보고 싶겠지. 그럼에도, 난 자네가 투표하러 온다는 대의명분에 감격했다네. 까짓 거 기권하고 말지 힘들게 귀국까지 해서 투표를 할 게 뭐냐고 자식들은 생각할 것이네. 자네만은 이민을 간 것이 아니었어. 자네한테 투표권이 살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더구나 그 먼 곳에서 투표하러 올 줄은 정말 몰랐네. 아마 친구 녀석들이 자네를 이상한 눈으로 볼걸. 허허. 벌써 자네가 투표하러 귀국한다고 했더니 혹시 자네가 망령 난 것이 아니냐고 웃더군. 내가 한마디 했지. 엎으러 지면 코 닿을 데 투표소가 있는데도 투표 안 하고 놀러 가는 젊은 애들보다는 자네가 훨씬 애국자라고 말이네. 자네나 나나 친구들 사이에서는 인터넷 잘한다고 부러움을 샀지. 세상 돌아가는 것도 다른 친구들보다는 소상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 자네가 귀국해서 투표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인터넷 탓이 아닐까 생각하네. 물론 떠나있던 내 나라가 그리워서기도 하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보고 있는 나라 꼴이 너무나 한심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되네. 자네 애국심이야 정말 알아줘야지. 사관학교 나와서 월남전에 중대장으로 참전했고 서해안 섬에서도 근무했지. 자네는 전쟁과 인연이 깊었네. 6·25 때 피난길에 소년병으로 전쟁을 겪었고 월남전에서 전투했으니 두 번이나 전쟁을 한 거지. 한 번은 내 땅에서 한 번은 남의 땅에서 말이네. 자네가 들려주는 월남에서의 전쟁비사는 참혹했지. 한 마을이 흔적도 없이 불타버리는 초토화 작전을 우리는 영화에서만 봤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 전투는 인간의 야만을 자넨 온몸으로 경험했네. 그래서 자네는 군인이면서도 전쟁 반대자였네. 지금 전쟁의 공포가 국민들 사이에 퍼져가고 있네. 나 역시 마찬가지야. 영 불안해. 대북 심리전 방송을 다시 시작한다고도 하고 방송시작하면 조준 사격한다고 하고. 천안함 사건. 자네는 해사출신이니까 뭘 좀 알겠지만 여긴 솔직히 말해서 뭐가 뭔지 모르는 판이네. 정부에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해서 발표했겠지만 잘 믿지를 않아. 툭하면 명예훼손이다, 유언비어 살포다 하고 겁을 주지만 믿기지 않는 데야 어쩌겠나. 그 책임이 누구한테 있느냐를 따져봐야 하지 않겠나. 자넨 잘 알겠지만 TOD인지 뭔지도 있으면 처음부터 다 내놓고 봐라 하면 될 것을 없다고 딱 잡아떼다가 정황이 드러나면 조금 내 놓고. 이게 다라고 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또 찔끔 내놓고. 그게 벌써 몇 번째인가. 이러니 이제는 국민들은 정부가 무슨 소리를 해도 믿지 않는 최악의 상태가 되어 버렸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인지 자넨 잘 알지. 자네가 그랬지. 전투할 때 부하들이 소대장이나 중대장을 믿지 않으면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맞는 말이네. 집에서도 애비가 거짓말을 하면 그 집안은 끝장이 아닌가. 설사 좀 불리한 것이 있더라도 정직해야 하네. 더구나 국가가 국민에게 하는 말이야 여부가 있겠나. 그래서 지금 정부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일세. 정직과는 무슨 원수가 졌는지 불신을 밑에 깔고 출발한 정부는 날이 가고 달이 가도 바뀌지가 않네그려. 그러니 정치인들 제대로 돌아가겠나. 천안함 문제도 이롭든 해롭든 처음부터 일치단결 조사단 꾸려서 진실 밝혀냈으면 이 지경이 안 됐네. 이제는 정말 힘들어졌네. 정부가 6.2 지방선거를 너무 의식한다는 여론이 점점 높아지고 정부는 진땀을 흘리며 진실을 알린다고 백방으로 뛰고 있지만 그게 맘대로 되는 것인가. 출발이 안 좋으면 결과도 안 좋은 경우가 많다네. 자넨 너무 잘 알지만 국민들이 걱정하는 것은 전쟁이라네. 자네나 나나 모두 전쟁을 겪어 본 세대가 아닌가. 더구나 자네는 전쟁을 두 번이나 겪은 불행한 남자야. 처참한 전쟁의 현장을 두 번이나 목격한 자네가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리도 있고 설득력도 있네. 나도 전쟁이 너무 무서워. 제일 두려운 것이 전쟁이네. 애들도 말싸움하다가 코피 터지는 몸싸움을 벌이듯이 어른들의 전쟁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믿네. 지금 이번 선거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국민의 강한 의지가 표명되어야만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네. 자네도 그런 생각으로 이번에 귀국을 하는 것이 아니겠나.
두 번이나 전쟁 겪은 노병의 한 마디
까불지 마라. 전쟁 나면 너도 죽어!
우선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네. 자네의 귀국이 뭘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아는 내게 가장 반가운 소식일 거 같아서 연락한다는 우정에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군.
어제 광화문 광장에서 야당 시장 후보의 선거운동을 지켜봤네. 며칠째 가보는데 점점 관중이 늘어가더군. 관중보다 운동원이 더 많은 경우를 보는데 이번에는 관중이 훨씬 많고 시간이 갈수록 몰려드는 시민들이 더 많아지네.
이분법이라고 하나. 젊은 애들은 진보적이고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보수 꼴통이라고 딱 갈라서 나누는 것 말일세. 어떤가. 우리가 보수 꼴통인가. 흔히 합리적 보수라고 하는데 우리가 그런 보수가 아닐까.
젊은 애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 애들이 날 뻔히 쳐다본다네. 꼴통보수가 아니라서 이상한 모양이야. 내가 그런다네. 나라를 위하는데 꼴통보수가 어디 있고 진보가 어디 있느냐고. 내 새끼들 다 죽어나갈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꼴통이 어디 있느냐고.
투표 날만 되면 투표는 하지 않고 놀러 갈 생각만 하는 애들이 무슨 애국심이 있고 가족애가 있겠나. 헌데 달라졌네. 꼭 투표를 한다는 젊은 애들이 많아져서 기분이 좋네. 투표야말로 정치를 바로잡고 못된 놈들 정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지 않겠나.
그러다 보면 못된 놈은 아예 선거에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정치는 깨끗해지지 말라고 해도 깨끗해지는 것이지.
전쟁이냐 평화냐. 이건 야당만의 구호가 아니라네. 만약에 전쟁이 난다면 어떻게 되는지는 자네가 너무나 잘 알겠지. 얼마나 죽을까. 우리야 인생 거의 다 살았으니까 덜 분하다고 하지만 이제 열 살도 안 된 손자 놈들은 어쩐단 말인가.
6.25의 폐허에서 이만큼 가꿔 온 경제는 어떻게 되겠나. 생각만 해도 아득해진다네. 어디 그뿐인가. 이 땅의 젊은이들이 피로 쌓아 온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만다네. 우리는 자유당 때 독재를 경험한 세대네. 그 시대가 다시 돌아온다는 끔찍한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그런 불행이 이 땅에 결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우리가 눈 부릅뜨고 감시를 해야 되네. 자네의 귀국이 내게 또 다른 희망을 주었네.
도착하는 날 공항에서 보세.
2010년 5월 29일
이 기 명(전 노무현후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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