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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싱크탱크의 가능성

세미가 2007. 3. 7. 16:08
 

한국적 싱크탱크의 가능성


<한국적 싱크탱크의 가능성>강원택․박인휘․장훈 지음


한국적 싱크 탱크의 가능성이라는 책은 크게 세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세분의 저자가 한 파트씩을 써서 묶은 셈이다.


박인휘 교수님이 쓰신 부분은 <싱크탱크: 정치는 3차산업>으로 싱크 탱크의 의미와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싱크탱크에 대한 소개와 역할이 갖는 의미를 기술하였다.


장훈 교수님이 쓰신 부분은 <미국이 싱크탱크: 권력과 지식의 밀월 혹은 예종>이라는 제목으로 정책 지식인의 등장과 싱크 탱크, 권력과 지식 사이의 거리 재구성 등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 하였다.


세번째 부분은 강원택 교수님이 쓰신 부분으로 <한국형 싱크탱크 가능한가?>라는 부분으로 한국에서의 싱크탱크가 활발하지 못했던 점과 한국의 싱크탱크의 현실과 향후 역할과 기대에 대한 내용들이 이야기 하였다.


미국의 싱크탱크 사례를 보면서 한국의 싱크탱크의가능성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 책이었다.  미국 대통령들의 싱크탱크의 역할에 대한 부분을 발췌해 보았다. 함께 읽고서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루스벨트․케네디․레이건․부시 Jr.의 닮은 점?


미국의 싱크탱크가 성공적인 역할을 한 대표적인 예를 미국 대통령 집권과 국정운영 사례에서 찾아보면 32대 루스벨트, 35대 케네디, 40대 레이건, 43대 부시 대통령의 사례는 좋은 본보기이다.

이 네 명의 대통령 집권 사례로부터 싱크탱크에 관한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을 하나씩 소개하겠다.


루스벨트이 경우는 1930년대의 경제 위기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전문가집단을 전면에 내세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루스벨트 주변의 전문가 집단은 전문가 집단의 역할에서 루스벨트 이전과 루스벨트 이후를 가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 유권자는 때론 정치 권력자들에게도 전문가집단이 과연 얼마만큼 신뢰할 만한 능력을 가진 집단인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의존한 당시의 전문가들은 전문가 집단에 대한 일반인과 대통령의 의구심을 상당부분 해소해주었다.

 루스벨트는 선거 유세 기간에 경제학자, 법률가, 금융전문가 등이 제안한 다양한 정책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집권 이후 입법한 사회보장법과 공정근로 기준법 등이 유세 기간에 밝혔던 정책들을 제도화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루스벨트는 대통령 선거를 정책 대결로 변화시킨 첫 대통령이고, 여기에는 각 분야 전문가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루스벨트는 선거전에 활약을 인정해 등용한 전문가들을 활용할지 몰라 대개의 전문가들은 본업으로 돌아가거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없는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만족해야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 기간의 싱크탱크는 전문가집단에 의한 정책개발의 필요성과 대통령의 성공적인 직무 수행을 위해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지만 그들의 역할과 정책을 재생산할 만한 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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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년 케네디 대통령의 당선은 한마디로 ‘상비 전문가’ 시대의 진정한 도래를 의미하였다. 스스로 유권자에게 ‘행동하는 지성’으로 비춰지길 바랐던 케네디 대통령은 행정부 바깥에 있는 전문가들의 자문을 구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케네디는 경쟁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친화력과 명쾌함으로 지지자들을 확보해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케네디는 중간 관료들이 전문가집단으로 충원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케네디는 선거 기간 중에도 그는 여러 자문 기구나 연구소에서 훈련을 쌓은 전문가집단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집권 이후 이들을 대거 등용했다.

케네디의 집권과 재임은 브루킹스연구소를 빼고는 논하기 어렵다. 당시만 해도 대통령 선거 직후 정권 인수팀을 위한 정부 지원이 제도적으로 마련되지 않았던 때라 브루킹스 연구소는 케네디 대통령의 정권 이양을 위한 인적․공간적․정책적 진원지였다. 케네디 대통령을 통해 정권에 들어온 브루킹스 출신 연구원들은 1960년대를 풍미한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의 중심이었고, 대략 100개에 가까운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시킨 그야말로 국가 정책 개발의 보고였던 셈이다. 케네디 대통령이 싱크탱크의 역할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었던 데에는 다음 세 가지의 시대적 배경이 존재한다.

 첫째, 연구 방법에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시스템 분석기법을 적극 도입함과 동시에 실제 작동을 전제로 한 실험을 상시 실행할 수 있는 계량화된 연구 기법이 개발됨으로써 특정 정책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최적의 대안들이 제시될 수 있었다.  연구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랜드연구소 출신의 맥나마라(Robert McNamara)가 케네디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역임하였던 사례는 좋은 보기이다.

 둘째, 전문가 정신의 존중을 들 수 있다. 학자를 중심으로 한 전문가 집단의 현실 참여에 도덕적 관대함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전문가들이 특정 직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행정부의 자문에 응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케네디가 남다른 애정을 보였던 ‘경제자문위원회’ 같은 기구들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케네디 대통령의 재임기에 싱크탱크가 성장한 배경에는 이념 논쟁의 종말이라는 사회적 상황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보편적인 미국인들의 관심은 사회복지나 지방정부의 역할과 같은 구체적인 목표들로 집중되었고, 정책 입안은 국민들의 행복을 구체적으로 결정짓는 대단히 실용적인 관제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된다. 싱크탱크로 통칭되는 정책 개발 집단과 여기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일상적 삶의 유용함을 제공하는 이로운 존재임은 물론, 비록 이들이 정치적 목적을 전제로 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미국 사회의 발전을 이끄는 창의적인 집단이라는 공감대가 생겨났던 것이다.



1980년 선거에서 당선된 레이건 대통령 역시 싱크탱크 역할의 긍정론을 극대화시킨 인물로 꼽을 수 있다.  싱크탱크의 역할과 관련해 레이건 태통령의 집권이 가지는 가장 상징적인 특징은 싱크탱크가 ‘국가 경영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제공하는 주체로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헤리티지재단은 레이건 집권과 함께 영향력을 확대한 대표적인 싱크탱크로 알려져 있다. 헤리티지의 등장은 미국 내 보수파 전문가 집단의 홍보 전략을 극대화시킨 성공 사례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전임 카터 행정부의 자유주의 정책에 식상한 유권자들의 과감한 선택이었다는 차별화된 설명이 여전히 상당한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헤리티지의 역할은 분명히 레이건 당선의 일등 공신임을 부인 할 수는 없다.

헤리티지 재단은 싱크탱크와 경영 마인드를 접목시킨 대표적인 기관이다. 헤리티지재단은 1980년대 유권들의 정치적 기호를 정확하게 파악하였고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한 전략들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학구적이고 현학적이던 이전의 싱크탱크와 확실히 차별적이었다.  헤리티지 재단은 정치인과 행정부가 필요로 하는 자료와 보고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예측해냈다. 헤리티지가 작성한 “Mandate for Leadership"는 레이건 집권 8년동안 정책 방향을 제시한 결정적인 기초가 되었다. 레이건 집권 기간의 경제 정책이었던 레이거노믹스, 안보 정책으로 구소련과의 신냉전 정책, 사회 정책에서의 신보수주의 도입 등은 이미 그 보고서가 핵심적으로 다루었던 사안들이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싱크탱크와 대통령의 정책과 관련하여 현 부시 행정부와 AEI 간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부시 행정부는 싱크탱크를 미국 ‘패권 전략의 이념적 발판’으로 삼았다는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미국기업협회’라는 기관이 모태인 AEI는 작은 정부, 기업 활동 보장을 위한 문화․정치제도 보호, 강력한 외교․국방 정책 등 보수주의 이념을 기반으로 한 공개토론, 출판 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다. 어빙 크리스톨(Iriving Kristol)을 위시한 상당수 AEI 인사들이 부시 행정부와 직․간접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러한 관계 설정은 헤리티지 재단과 레이건 대통령의 관계처럼 당선 이전부터 오랫동안 진행되어온 정치적 프로젝트의 결과로 보기는 어렵다.

AEI가 밝히는 외교안보 정책은 한마디로 ‘기업가 정신의 대외 정책화’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911 테러는 소위 신보수주의자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였던 셈이다.  2003년 이라크전쟁과 관련하여 부시 행정부의 기본 입장이었던, 1)이라크 정권 교체, 2) 범세계적 미사일 방어 테제(Missile Defense, MD)구축, 3) 기존 군축조약 탈퇴, 4) 이스라엘 리쿠드 우파 정부와의 기밀한 연대 등은 AEI에서 대외 정책을 담당하는 마이클 리딘(Michael Ledeen)과 탐 도넬리(Tom Donnelly) 두 연구원이 초안을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AEI의 주요 인사들이 현 부시 행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자로 참여하고 있다. 부시 대통령에게는 전 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 확산을 위해서 군사력을 포함한 국력의 사용, 선제 공격, 새로운 국가 건설, 지속적인 미국 이념의 투사 등을 구체화할 정책 개발의 심장으로 AEI라는 싱크탱크가 곁에 있는 것이다.

 

www.yeskj.or.kr 광재 블로그에 올려진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