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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광주, 나에게 5.18?

세미가 2010. 5. 17. 09:01

30년 전의 광주를 생각합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금남로를 기억하십니까?

물론 저는 그 당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어린 나이였고 제 고향 완도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가끔 아버지께서 광주 사태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제게는 멀고 먼 이야기였습니다.

 

 

저의 첫 번째 5.18의 기억은 초등학교 5학년 담임선생님의 책상 위에 놓인 ‘광주사태의 진실’이라는 사진첩을 본게 처음이었습니다. 목이 잘린 사진과 얼굴이 짓이겨 져 있는 그 사진을 보고 며칠을 악몽에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그냥 무섭고 놀라웠고 아버지 사진을 들고 있는 한 아이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저에 기억 속의 5.18은 잔인하고 무서운 사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제게 5.18은 시 하나로 기억됩니다.

 

아버지를 5.18에 잃은 중학생이 쓴 시라고 합니다. 국어 선생님 소개로 시를 알게 되었고 서점에 가서 시집을 샀던 기억이 납니다. 박용주님의 바람찬날에 꽃이여 꽃이여..

 

그 시집에 목련이 진들이라는 시입니다.

 

목련이 진들

박용주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소리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흰 빛 꽃잎이 되어

우리네 가슴 속에 또 하나의

목련을 피우는 것을

 

그것은

기쁨처럼 환한 아침을 열던

설레임의 꽃이 아니요

오월의 슬픈 함성으로

한닢 한닢 떨어져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순결한 꽃인 것을

 

눈부신 흰 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러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

 

 

시도 시이지만 이 시를 중학생이 썼다는 것 자체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전남대에서 주최한 오월 문학상을 받았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 낱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

 

해마다 꽃이 질 때 목련이 질 때 생각나는 시입니다.

 

여고시절, 저희 학교 선생님들은 대학시절, 고등학교 시절을 광주에서 보내셨던 분들이셨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5월이 되면 항상 광주는 체류 가스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조선대 후문에 살았던 저는 5월이면 시민들은 집회를 하고 전경들은 체류가스를 뿌리는 것을 보며 지냈습니다. 5.18 시기가 되면 광주의 분위기는 달랐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선생님도 5.18에는 수업 대신에 “5.18이 알고 싶어요..말씀해 주세요..”라고 하면 수학 영어 쪽지 시험 대신에 5.18에 대한 기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젊은 선생님들은 1980년에 고등학교 대학교를 광주에서 보내셨던 분들이셨습니다. 정말 군화발에 찍히는 시민들을 보았고 총에 맞아 죽는 시민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고교 시절의 5.18은 쪽지 시험 대신에 들을 수 있는 조금은 가슴 아픈 광주의 과거였던 것 같습니다.

 

대학생이 된 후, 선배들이 신입생을 저에게 일요일 날 갈 곳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소풍 가는 기분으로 김밥을 싸서 나갔는데 그날 간 곳은 구 망월동이었습니다. 박승희 강경대 열사 5.18에 희생된 수 많은 시민들 그리고 민족 열사분들이 계시는 곳.. 대학교 1학년이던 저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염없이 무명 열사의 묘 앞에서 눈물만 흘리다 왔었습니다.

 

대학 시절, 해마다 오월이 되면 가슴 아픈 광주 시민들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잃고 오빠 동생 누나를 잃었던 5.18 , 영화 꽃잎을 통해 조금씩 사람들이 5.18의 진실이 밝혀지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던 형부와 언니는 매년 경찰들의 눈을 피해 5.18 행사를 준비했는데 정권이 바뀌자 경찰들과 관에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망월동은 국가공원으로 잘 정비되었습니다. 과거를 보상 받은 것처럼...

 

 

그리고 또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모래시계 같은 드라마에서 5.18 관련 내용이 언급 되기도 하고 인터넷 만화도 나오고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의 주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 영정 사진을 들고 있던 그 꼬마 아이는 몇 년 전 결혼을 했고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었을테고, 대학생 아들을 잃었던 중년의 어머니는 이제는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피를 흘리며 떨어진 수 많은 꽃과 같은 젊은이들과 시민들이 있습니다.

 

광주에는 아마도 1년 중에 가장 많은 제삿날이 있는 날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5.18의 아픔을 그리고 그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민주화 시대를 열망하고 원했던 수 많은 시민들의 열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민주화를 역행하는 지금 현실이 30년 전 5.18을 생각나게 합니다.

 

꽃이 만발한 오월..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