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 광주 망월동에 다녀왔습니다.
김철수 열사 20주기 추도식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김철수 열사는 20년 전, 명지대학교 강경대 열사, 전남대학교 박승희 열사의 죽음과 분신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1991년 당시, 11명의 열사들의 죽음이 있었던 해였다고 합니다.
보성고등학교 3학년이던 강경대 열사의 타살을 규명하고 박승희 열사의 분실을 가슴 아파했던 김철수 열사는 참교육을 외치고 제도 교육을 규탄하며 몸을 불살랐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인 학생이 스스로 몸을 불살라야 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닌 시절은 그 후 3년 후 였는데 그냥 평범한 고교 생활을 했었으니 말입니다.
그때 고등학교 풍물패를 했던 언니는 광주에서 보성으로 내려갔습니다. 고등학생의 죽음이니 고등학생들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며 보성고등학교 학생들과 광주에서 내려간 고등학생들이 장례에 참여 했다고 합니다.
그 시기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교단을 떠나야 하고, 분신과 의문사.. 고등학생들까지 몸을 불살라야 하는 그런 시기였던 것입니다.
20년 전 고등학생이던 언니와 형부는 처음 만났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첫 만남이 김철수 열사 장례식이었으니.. 열사가 두 사람을 맺어준 것입니다.
조카 휘민이와 함께 추도식에 가면서 오늘 추도식 하는 삼촌이 휘민이를 있게 해준거라고 설명을 해줬습니다.
망월동에 도착해서 꽃집에서 국화꽃 10송이를 샀습니다. 무명열사 분들 묘역에 한 송이씩 꽃을 놓아주고 싶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꽃집 아주머니는 향과 라이터도 빌려 주셨습니다. 향도 함께 피우라고... 역시.. 남도의 인심인가 봅니다.
묘역에 들어서기 전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석을 발로 밟고 갔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내 몰았던 사람.. 비석은 많은 사람들 발에 밟히지만 그 분들은 아직도 잘 살고 있습니다. 참 억울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명 열사들 묘역에 다 시들어버린 국화 꽃이 한송이씩 놓여져 있습니다. 그 옆에 국화 한송이 씩을 놓았습니다. 무명 열사분들을 위해 가끔 이렇게 국화 한송이씩을 놓고 가는 분들이 있나 봅니다.
강경대 열사, 박승희 열사, 김남주 시인등 많은 분들의 묘역 옆에는 대학노트와 종이학과 조화까지 찾아온 사람들의 흔적이 많은데 무명 열사분들의 묘역은 늘 허전합니다.
임신 8개월째 계엄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은 최미혜님의 사진이 보였습니다. 지나가던 발길이 멈춥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 사진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아이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보낸 가족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요?
아직도 실종자로 생사 여부도 알 수 없는 행방불명된 분들의 영정을 모아 놓은 곳을 보면 8살 날 아이가 실종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돌복을 입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 살아 있다면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마음 속에서 살아 있을 그 분들의 가족들의 최소한 생사 여부라도 알거나 돌아가셨다면 시신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추도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철수 열사 추도식은 유가족 협의회 가족들과 전교조 선생님들, 그리고 고등학교 때 함께 활동했던 선배 후배들이 함께 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10대 학생들이 이제는 결혼을 해서 엄마 아빠가 되었고 4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영정 속의 열사는 아직도 앳된 고등학생의 모습입니다.
한여름처럼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추도식은 추모사와 유가족 대표인 김철수 열사 아버님 말씀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끝났습니다. 참교육과 평화 통일을 바라던 고등학생 김철수.. 자식을 떠나보낸 유가족 협의회 부모님들이 오셨습니다. 그 분들의 머리가 반백이 되신 부모님들의 뒷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편지를 낭독하던 중앙여고생이었던 분은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을 믿습니다. 다음에 살아서 다시 힘내어 만납시다”라는 말이 귀를 때립니다.
다 펴보지도 못하고 떠나버린 아들의 20번째 추도식에 참석한 부모님..열사의 아버님께서 간단하게 감사 인사를 하셨습니다.
끝나고 망월동 주차장에서 모여서 식사를 했다. 김철수 열사 어머님께서 매년 나물과 반찬을 만들어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정성스럽게 만들어오신 나물과 반찬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박승희 열사 아버님과 류재을 열사 아버님, 이철규 열사 어머님까지 여러 열사분들의 부모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대학 1학년 박승희 열사를 기리는 승희 학교에서 처음으로 박승희 열사 아버님을 뵈었습니다. 목포에서 올라오셨다고 합니다. 그 후로 행사때 마다 참석하시는 박승희 열사, 강경대 열사 부모님을 보면서 자식이 열사가 되면 부모님이 투사가 된다는 말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이철규 열사는 조선대학교 재학 중에 광주댐 제4수원지에서 익사체로 떠올랐습니다. 고문 흔적이 있었으나 실족사로 처리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의문사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철규 열사는 언니 친한 언니의 친 오빠였습니다. 언니와 함께 모임도 하고 저도 자주 본 언니였습니다. 그래서 이철규 열사는 꼭 아는 분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광주에 살다보면 한 다리 건너 이렇게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철규 열사 어머님은 허리가 많이 아프시다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를 의지해서 걸을 수 밖에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11시에 추도식이었지만 어머님은 새벽에 집에서 나오셨다고 합니다. 망월동까지 버스를 두 번 갈아 타시고 망월동에서 또 묘역까지 한참을 걸어오셔야 합니다. 어머님처럼 지팡이에 의지해 오시려면 30분 이상을 걸으셨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일찍 오셔서 기다렸다고 합니다. 지팡이에 의지하며 뜨거운 햇살 아래 걸어오셨을 어머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20대의 젊은 아들이 누워있는 망월동에 오실 때 마다 어떤 생각이 드실까요?
집에 가실 때, 박승희 열사 아버님이 태워다 드린다고 하셨지만 굳이 마다 하셨습니다. 그냥 버스 타고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성격이셨습니다. 언니가 어머님께 끝나고 어머님 집 근처에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님과 함게 가게 되었습니다.
망월동 추도식때 마다 오시는 어머니는 이번달 만 벌써 몇 번째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날도 망월동에 오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광주에 사는 딸이 태워다 드린다고 하셔도 마다하시고 새벽에 나오신다고 합니다. 워낙 곧은 분이셔서 그러신지 자식에게까지 피해를 안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몸이 안 좋은데도 추도식에 매번 나오시냐는 말에.. 유가족들이 함께 해줘야지.. 내가 힘들다고 안 오면 되겠냐고 하셨습니다. 22년 전 아들인 이철규 열사를 그렇게 보내시고 매년 열사들의 추도식을 다니셨다고 합니다. 건강이 안 좋지만 그래도 걸을 수 있으실 때 까지는 늘 그 자리에 함께 하실 것 같았습니다. 자식을 억울하게 보내신 부모님들의 동병상련의 마음을 나누고 계시는 듯 했습니다.
장성에서 평범하게 살았던 한 어머니가 아들을 보내고 나신 후 투사가 되셨습니다. 연세가 드신 열사 분들의 부모님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제까지 흘려왔을 피눈물과 원통함..
망월동에 오실 때 마다 어떤 마음으로 오실지... 활짝 펴보지도 못한 채 젊은 나이에 가버린 아들 딸들이 누워있는 망월동 묘지에서 느끼실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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