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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누구)좌절과 희망, 투쟁...현대사의 산 증인

세미가 2009. 8. 18. 15:34


(DJ는 누구)좌절과 희망, 투쟁… 현대사의 산증인
사상 최악의 경제위기가 몰아치던 지난 1997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한국 정치사의 한 획을 그었다.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것이다. 앞서 두달전 자유민주연합과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끈 뒤의 쾌거였다. 국민들은 열광했고, 한국 정치는 새로운 도약의 신호탄이 울렸다.

김 전 대통령은 고난의 역사를 살았다. 독재정권의 핍박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도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민주화에 대한 일관된 신념, 포기를 모르는 강단, 특유의 달변과 정치적 돌파력은 잡초와 같은 그의 승부근성의 바탕이 됐다.

그의 인생 역정은 좌절과 희망, 투쟁과 피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 그 자체였다. 억압의 시대에는 희망의 빛이었다. 모진 한파를 이겨내고 봄이 오면 인고의 꽃을 피우는 인동초(忍冬草)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924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났다. 목포상고를 졸업한 후 20대에 목포일보 사장이 됐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8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963~1967년 민주당ㆍ민중당ㆍ신민당 대변인, 1968년 신민당 정무위원을 역임한 이후 그의 위상은 급성장했다. 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겨뤘으나 패배했다.

다른 한편으로 ‘김대중’ 존재는 박정희 정권의 가시였다. 김 전 대통령은 대선 패배후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가 지난 73년 8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해 국내로 납치돼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고난의 행군은 계속됐다. 지난 76~78년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투옥됐고, 80년 7월엔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으나 씁쓸하게 미국으로 건너갈 수 밖에 없었다.



3년뒤 귀국한 김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더불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역임하면서 정치적 재개를 모색한다. 87년 11월엔 평화민주당을 창당,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또 실패했다. 92년에는 다시 대선에 도전했지만 ‘영원한 라이벌’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씁쓸한 패배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3선에 실패한 그는 국회의원을 사퇴하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에 전념했다. 하지만 이역만리 타국에서 있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한국 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쩔수 없는 정치인이었다. 94년에 귀국한 그는 아시아ㆍ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해 이사장으로 컴백했다. 재야에 있었지만, 당시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를 막후에서 이끌었고, 95년 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민주당의 승리를 이끌었다.

아예 다음달인 7월 김 전 대통령은 정계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총재를 맡으면서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97년 10월 자유민주연합과의 야권 후보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달성했다.

대통령 재직땐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외교행보에 치중했으며, 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ㆍ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극복했다.



특히 대북정책에 관한한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의 창시자이자 실천자였다. 2000년 6월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 서로를 포옹하는 장면은 전세계의 시선을 끌었다. 김 전 대통령의 방북은 6ㆍ15남북공동선언을 도출해냈다.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이같이 50여년간 지속돼 온 한반도 냉전을 일부 해소하고 남북평화의 새 장을 열었다는 공로를 인정 받은 것이다.

앞서 99년 5월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됐고,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한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당당히 자리했다. 아시아 민주화 대표 주자로 각인된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 등 자신의 후예들에 대한 지원에 전력을 기울였고, 기회 있을 때마다 햇별정책 강연을 통해 그 소신을 결코 접지 않았다. 최근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자신의 반쪽을 잃었다고 슬퍼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김영상 기자/ysk@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