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희망이야기

이산가족 상봉 - “예뻤는데 왜 이리 쪼글쪼글해 졌니?”

세미가 2009. 9. 29. 10:27

 

 

이산가족 상봉이 1년 11개월 만에 다시 재개 되었다.

이산가족 신청자 8만명 중 하루에 10명씩 돌아 가신다고 하신다.

분단 60년이 되어가면서 10대 꽃다운 소녀는 70대 할머니가 되어 가고, 30대 젊은 아버지는 90세 100세를 바라보는 연세가 되셨다.

 

어릴적 이산 가족 상봉 장면을 티비로 본 기억이 난다. 83년엔가 KBS 방송을 통해 봤던 이산가족상봉.. 막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 쯤 되었던 것 같다. 몇십년 만에 맞잡은 손을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중년의 딸과 어머니.. 그 장면이 오랫동안 기억이 남는다. 이산가족 상봉을 이야기 하면 항상 그 장면이 눈에 떠오른다. (사실 그때는 너무 어려 이산가족이 무엇인지..왜 이렇게 사람들이 만나 우는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어제 금강산 호텔에서 마지막 이별의 상봉 시간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서로를 보내지 못해 손을 부여잡고.. 한참을 차가 떠날 수 없었다는 기사를 봤다.

이제 헤어지면 살아 생전에 또 다시 볼 수 있을까??

 

100세의 어머니와 75세의 셋째딸의 만남, 경기 여고 1학년이던 딸은 어느덧 75세의 노인이 되었고 어머니는 100세가 되었다. 생후 3개월이던 막내 동생은 어느덧 할아버지가 될 나이가 되었다.

 

 

딸을 알아보지 못하던 90대의 할머니가 마지막 이별의 상봉 시간에 58년 만에 만난 딸을 알아 보았다.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었다. “예뻤는데 왜 이리 쪼글쪼글해 졌니?”라며 눈물을 흘렸고 할머니는 손에 낀 금반지를 딸에게 끼워주셨다.

 

82세의 부인과 79세의 남편, 말을 알아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북에서 온 아내와 남측의 아내는 서로 어색해서 말도 못했지만 헤어질 시간이 되자 말을 하려고 애써도 말을 할 수 없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남측으로 가는 아버지에게 큰 절을 하는 반백의 딸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 통일 되는 그 날까지 살아 계셔야 합니다. 건강하세요...”

 

아들 딸이 손을 잡은 97세의 할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북측 자식들과 남측 자식들이 만나서 사이 좋게 지내거라.. ” 아마도 할아버지가 살아 생전에는 다시 다 같이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하셨을까?

70대의 손을 맞잡은 남매.. 젊은 시절의 오빠 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반백의 머리를 한 남매.. “너무 좋아 말도 안 나온다. 꿈인가 생시인가?” 이제 언제 다시 만날지.. 부모님은 벌써 세상을 떠나신 후다.

 

50대 동생과 60대 형님, 처음 본 사이다. 형제지만 얼굴을 본적이 없는 형제가 두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린다.

 

살아 계시는지 돌아가신지 몰라 이제껏 제사를 지내왔다는 딸의 이야기, 어릴적 살구꽃 피고 뛰어 놀던 고향 땅에 딱 한번이라고 가고 싶어했지만 갈 수 없는 실향민..

 

그냥 이런 사연 하나 하나에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파온다.
정말 당사자들은 얼마나 더 가슴 아프고 마음을 도려내는 듯 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려온다.
 
더 시간이 흐르면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있는 가족이 점점 사라진다.
벌써 7-80대의 어르신들이 얼마나 더 기다릴 수 있을까?
한 70대의 실향민인 노인분이 이번 이산가족 상봉 명단에 들어 가지 못하고 열차에 투신하셔서 자살했다는 기사를 봤다.

이게 얼마나 큰 불행인가?

초등학교 때 해마다 6월이면 반공 글짓기와 포스터와 표어를 만들어 냈던 기억이 난다. 그걸로 시상도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부터는  일반적인“무찌르자 공산당”이라는 표어를 쓰지 않았다.

명절날 임진강에서 눈물 흘려야 하는 실향민을 이야기 했고 우리 오빠들이 왜 우리 민족인 북한에 서로 총을 겨누어야 하는지, 서로 한발짝 양보하는 남북 화해를 이야기 했다. 그렇게 반공 글짓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반공 글짓기에서 상을 못 받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 기억이 남북 관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고민하던 유년 시절의 기억인 듯 하다.

근 10년동안 남북 화해 무드가 급속도로 진행 되었다.

 

그 시기에 나는 북한에 연탄 배달을 위해, 북한에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기 위해 금강산과 개성을 수차례 다녀왔다. 너무나 추운 겨울을 나야 하는 북한 주민에게 연탄 한 장은 그냥 연탄 한 장이 아니다. 그리고 헐벗은 금강산은 땔감이 없어 작은 어린 묘목까지 다 캐내 산은 민둥산이다. 나무를 심어주고 그 대신 땔감 대신에 연탄을 땔 수 있게 연탄을 배달하는 것이다. 그 작은 연탄 한 장이 남과 북의 얼었던 마음을 녹여 줄 수 있길 기대했었다.

 

 

 

               <83년 이산가족 상봉>

 

한번은 개성에 가는 날, 같이 근무하던 보좌관님이 부탁을 했다. 93세의 할아버지 고향이 개성인데.. 개성 가면 개성의 흙을 조금만 가져다 달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 흙이라도 한번 만져 보고 싶으시다고.. 그래서 조그만 비닐 종이에 흙을 조금 퍼다 드린적이 있다.

근 60여년을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셨을 할아버지, 고향 땅을 밟아 보셨을까? 이번 이산 가족 상봉 대상자가 되셨을까 궁금하다.

 

이제 며칠 후면 추석이다. 추석이면 성묘 하러 갈 수 없는 많은 실향민들이 임진강에 가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것이다. 가지 못하는 고향땅을 기다리며 생사 확인도 안 되는 부모 형제를 생각하며..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분단 국가였지만 금강산도 가고 개성도 가고 평양도 가면서 남북 교류가 빨라지고 최소한 연락이라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작년부터 남북 관계가 급냉 되었다.

 

최소한 가족들이 이산 가족들의 상봉 정도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내 부모, 형제를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고, 생사를 확인 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상태로 60여년이 되어 왔다. 이건 그 분들에게 얼마나 가혹한 형벌인가??

 

10년 전부터 이산가족 상봉에 신청했지만 번번이 상봉이 안되어 열차에 투신했다는 75세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에게 58년 동안의 삶 속에서 이렇게 추석이 오고 설이 오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산 가족의 상봉 모습을 보는 것은 또 하나의 희망이었을테지만 또 한편으로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이 손을 언제 다시 잡을 수 있을까?>

 

 

하루에 이산가족이 평균 10명씩이 돌아가신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루 평균 돌아 가시는 이산 가족 수가 더 늘어 갈 것이다.

 

1년 11개월 만에 다시 시작된 이산 가족 상봉.. 2000년 이후 16번의 이산 가족 상봉이 있었다고 한다. 최소한 그 보다는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다. 이산 가족 당사자이며 1세대인 분들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

 

북에 인도적 지원인 쌀과 비료를 더 주더라도, 그 무엇을 하더라도 가족들이 생사를 확인하고 서로 연락하고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부의 최소한의 노력이고 배려라고 본다.

국민을 최소한이라도 배려하는 정부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