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싶은 여행지..

폐사지를 따라 떠나는 여행..

세미가 2009. 10. 26. 13:34

 
폐사지.. 절터만 덩그러니 남은 폐사지에 가면 어떤 느낌일까??

작년 폐사지를 따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여행 중에 가끔 폐사지를 둘러본 적은 있지만 폐사지를 테마로 한 여행은 처음이었다.
가을과 어울리는 테마 여행이었다.

여행지는 폐사지 4곳과 사찰 한 곳이었다.

역사의 숨결을 지녔던 절은 사라지고 절터만 남은 폐사지..
그 날은 충북 괴산에서 전날 모임을 하고 새벽녘에 폐사지 여행에 합류해서 너무나 정신이 없었던 기억이 난다.
거의 잠을 한숨도 못자고 여행에 합류했었다.


처음 간 곳은 법천사지 절터였다.

 

원주의 법천사는

 

석조물로는 고려시대인 1086년에 건립된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59)와 법천사 당간지주, 1965년 발굴이 이루어져 출토된 불상 광배, 불두, 파불, 배례석, 연화문대석, 용두, 석탑재 등이 탑비전지(塔碑殿址) 옆 요사지에 남아 있다.

이전에는 탑비 옆에 지광국사현묘탑(국보 101)이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옛 법천사 경내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주변 일대에는 민가가 들어서고 대부분 농경지로 변했으며, 곳에 따라 부락의 민가 안에 장대석 석축을 볼 수 있다.

법천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져 고려시대에 크게 융성한 사찰이다. 고려 중기 불교는 법상종과 화엄종의 양대 교단으로 나뉘었는데, 법천사는 법상종계의 사찰이었다. 특히 지광국사 해린이 초년에 수학하고 말년에 입적한 곳으로 이때가 전성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중창되지 못하였다. 조선 초기 학자인 유방선(柳方善)이 이 절에서 강학하였으며, 권람·한명회·강효문·서거정 등의 학자들이 이곳에 모여 시를 읊어 시문을 남겼다고 한다. <출처: 두산 백과>

 


작년에 갔을때는 발굴 작업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지.. 파란 천막으로 절터를 다 쌓아 놓아서 절터라는 느낌마저도 덜 했던 절 터였다..

귀부와 이수가 멋진 지광국사현묘탑비를 보았다. 귀부에 왕(王)자가 그려진 지광국사 현묘탑은 지광국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비라고 했다. 사리를 보관했던 현묘탑은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다시 되돌려 받았으며 현재 국립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지광국사는 고려의 6명의 왕을 보시며 국사의 칭호를 받으신 분이라고 했다.

6명의 왕을 모셨던 국사가 계셨던 절이라면 보지 않았어도 그 절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을 지는 상상이 되고도 남을 듯 하다.

법천사는 지금은 그 절의 터의 크기를 알 수 없지만 그 마을 일대가 모두 절터였다고 하니 국사의 위상만큼이나 큰 절이였을 것이다.

 


두번째 여행지는 거돈사지 절터였다.


거돈사지는?

 

금당(金堂)터에는 전면 6줄, 측면 5줄의 초석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20여 칸 크기의 대법당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금당터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에는 높이 약 2m의 불좌대(佛坐臺)가 있으며, 금당터 앞에는 보물 제750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 있다. 탑 옆에 있던 배례석(拜禮石)은 135cm ×85cm의 크기에 전면과 측면에는 안상(眼象)을, 상부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하였다. 3층석탑 북쪽 50m 지점에는 보물 제78호로 지정된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圓空國師勝妙塔碑)가 있다. 이 탑비는 1025년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최충(崔沖)이 짓고 글씨는 김거웅(金巨雄)이 썼다. 또 보물 제190호로 지정된 원공국사승묘탑은 고려시대 부도(浮屠)의 정형으로서 현재는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다. 불좌대의 대석(臺石) 주위에는 원래의 위치로 보이는 주춧돌들이 비교적 정연하게 제자리에 남아 있다. 기단(基壇)은 대부분의 지대석과 면석이 남아 있어, 나말 여초(羅末麗初)의 사찰로는 매우 희귀하게 유존 상태가 좋다. 이 절의 폐사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출처:두산백과사전>

 

 

 

신라 시대에 지어진 절이었지만 이 절 또한 원광국사라는 국사를 배출하였고 고려 시대에 더욱 알려진 절이라

 고 했다.

계단을 올라 가장 먼저 만난 것은 거돈사지 삼층석탑이였다. 신라 시대에 건립되어진 석탑과 그 뒤엔 부처상이 있었던 불대좌가 보였다.  이 절터는 발굴이 끝나서 인지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위쪽에서 바라본 절터는 참 크고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지금은 절터 뿐이지만 곳곳이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사람들의 숨결로 가득차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며 천년전의 거돈사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을 감으면 천년 전의 거돈사지가 번창했을 그 그림이 그려질 줄 알았는데 쉽게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 시대를 상상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큰 절인 법천사나 거돈사가 원주 내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고려는 정말 불교가 성행했던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거돈사지의 원공국사승묘탑비를 볼 수 있었다. 그전까지 그냥 봤던 귀부나 이수를 관심있게 보니 조금씩 틀린 특성이 있었다. 원공국사승묘탑비의 귀부의 등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거북이 머리 모양과 귀가 물고기 비닐 모양으로 새겨진 탑비였다.


절 입구에는 천년을 살아온 느티나무가 있었다. 거기엔 경고문이 참 인상적이었다.

 

<경고문>

<거돈사지 3층 석납 앞 이곳 느티나무 앞에 푸닥거리를 하고 음식물 찌거기를 버리는 남, 여, 것들은 벌을 받고 가리라.

* 쓸데 엇는 짓 하지 말것

** 환경청에 곳바로 고발조치한다.

시,문화재,청백>

 


세번째 여행지는 흥법사지 절터였다.

 

흥법사지는?

 

《고려사》에는 937년(태조 20) 당시 왕사(王師)였던 진공대사 충담(忠湛)이 입적하자 940년 진공대사의 부도탑이 있는 원주 영봉산(靈鳳山) 흥법사에 태조가 직접 비문(碑文)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흥법사가 신라 때부터 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흥법사의 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절터 주변은 모두 경작지로 변했다.

이곳에는 삼층석탑(보물 464), 진공대사탑(보물 365), 진공대사탑비, 전흥법사염거화상탑(국보 104)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보물 463)만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염거화상탑은 서울의 탑골공원으로 옮겨지고 진공대사탑과 진공대사탑비의 비신(碑身)은 일본으로 반출된 것을 되찾아 지금은 3점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네이버두산백과>

 

 

 

 

주택들과 밭 사이에 자리 잡은 석탑이 있었지만, 절터가 전혀 보존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절터의 축대가 쌓여진 곳에는 집이 지어져 있고, 밭을 일구고 있어 전혀 과거의 절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거돈사와 같이 고려초에 큰 역할을 했던 절이었을 것이라는 안내표지를 보면서 천년전에 큰 절로 국사를 배출하고 많은 신도들로 넘쳐 났을 사찰 폐사지의 황량함과 초라함을 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었다.


 

다음 여행지는 폐사지가 아닌 신륵사였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고려 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한데, 200여 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다고 하며,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 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렀다.

신륵사로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는 “미륵(혜근을 가리킴)이, 또는 혜근이 신기한 굴레로 용마(龍馬)를 막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 고종 때 건너마을에서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사람들이 붙잡을 수가 없었는데, 이 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자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神力)으로 말을 제압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 때부터 벽절[甓  寺]이라 불려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내의 동대(東臺) 위에 있는 다층전탑(多層塼塔)을 벽돌로 쌓은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 절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 보물 제228호인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9호인 보제존자 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 보물 제231호인 석등이 있으며,

유형문화재로는 극낙보전(極樂寶殿) 과 그이외의 부속건물로 구룡루(九龍樓) ·명부전(冥府殿)·시왕전(十王殿)·산신당·육각정 등이 있다. <출처:네이버두산백과>



나옹대사가 머물러서 더 유명해 졌다는 신륵사는 특이하게도 남한강 근처의 봉미산 끝자락에 세워진 절이었다. 절과 강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절의 풍경은 참 예뻤고 산책하기 좋은 절이었다.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절이라고도 한다.


선륵사 보존 석종과 석종비 그리고 석종등이 있었다.

 

 

선륵사 보존 석종은 나옹대사의 사리를 보존한 것이었다. 석종은 모양이 특이했다. 종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석종을 보고 있을때, 우연히 만난 문화 해설사분께서 나옹대사에 대한 설명을 여러가지로 해 주셔서 더욱더 의미 있게 사찰을 볼수 있었다. 참고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고려개국 공신인 무학대사께서 나옹대사의 제자라고 한다.

 
나옹대사와 무학스님을 모셔놓은 조사당 앞에서는 나옹대사가 지었다는 유명한 시조도 알려주시고, 극락사의 건축 양식과 그 앞의 다층석탑에 대한 유례도 알게 되었다.

탑에 새겨진 용의 발톱이 5개인 이유와 왜 그렇게 탑에 정성을 들였는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강가에 세워진 다층전탑은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이라고 한다. 이 전탑은 강의 액운을 막아 준다는 의미도 있고 강을 따라 나룻배들의 등대 역할도 했을 것이라고 한다.

 

 

신륵사를 둘러본 후 나오는 길에 나옹대사가 지었다는 시조를 생각해 보았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봉미산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고 남한강 강가에 세워진 신륵사와도 참 어우리는 시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갈 마지막 여행지는 고달사 터였다.

 

고달사는?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된 고달사는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하며, 고려시대에는 특히 광종(光宗) 이후 역대왕들의 비호를 받던 사찰이었으나,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절터는 북내면 상교리마을을 사면으로 병풍처럼 감싸안은 혜목산(慧目山) 산자락에 있으며, 지금은 전답 등 농경지와 임야로 되어 있다.

국보 제4호 고달사지부도(浮屠), 보물 제6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 귀부(龜趺) 및 이수(螭首), 보물 제7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 보물 제8호 고달사지석불좌(石佛座) 등이 있다. <출처:네이버 두산백과>



아주 넓은 절터였다. 아주 웅장한 절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을 고달사의 불좌대의 크기만으로도 웅장한 절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귀부와 이수만 남은 현묘탑의 크기도 웅장했고 귀부 뒤에 도깨비 문양도 그려진 특이한 모양이었다. 현묘탑비도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걸..이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고달사의 백미는 고달사지 부도라고 했다. 아주 크고 정교한 모양이었다. 중대에는 거북이 얼굴과 용의 그림이 조각된 멋진 부도였다. 탑과도 같은 고달사지 부도는 국보 4호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부도였다.

참고로..

국보1 남대문, 국보2호 원각사지10층석탑, 국보3호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국보4호 고달사지 부도 국보5호 법주사 쌍사자 석등..


국보4호인 고달사지 부도와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공식 여행지는 끝났다. 고달사지 터를 내려와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서울로 올라왔다.

 

여행의 테마는 스산한 폐사지에서 느끼는 역사의 흔적과 고즈넉함..

사찰의 부도나 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많은 공부를 한 듯 싶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예쁜 단풍이 물들어 가는 가을에서 더 깊어지면 한잎 두잎 낙엽이 거리에 쌓이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앙상한 나무 가지들이 유난히도 추워보여 안타까운 계절이 다가온다.

울긋불긋 예쁜 단풍들과 탐스러운 열매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앙상한 나뭇가지의 알몸을 보이기 시작하는 가을의 나무들과 폐사지는 닮은 듯 하다.

깊은 역사의 뒤안길에서 지금은 폐사지로만 남아 있지만 한 때는 수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로 번영을 누렸을 절터들을 본 기분은 묘한 여운이 남았던 기억이 있다.

폐사지로 책 한권 들고 떠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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