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책 그리고 인생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

세미가 2009. 11. 24. 17:56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

「안중근 투쟁 백주년, 순국 백주년」 기념 출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뮤지컬도 하고 있고 광고를 하는 것도 보았다.

 

그래서 안중근 의사 관련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출판단지 갔을 때 이기웅 선생님께서 책을 선물을 주셨다.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하셨고 10년전 안중근 의사의 순국 90주기를 추도하며, 그 분을 파주출판도시의 정신적 감리인으로 모신다고 하셨던 분이다.

 

파주 출판도시에 가면 안중근 의사의 흉상이 있다.

 

 

작년 가을이었던가 파주 출판단지 안중근 의사의 흉상 옆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열화당 이기웅 선생님께서 쓰신 안중근 전쟁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의 구성은

 

연대기로 보는 안중근과 그의 시대

 

뤼순 감옥에서의 검찰관 신문조서

 

뤼순 법원에서의 공판 시말서

 

로 이루어 진다.

 

서문과 연대기로 본 안중근 열사의 이야기를 먼저 정리해 본다.

 

 저자의 초판 서문에서 인상적인 문구가 있었다.

 

안중근 공판 기록을 읽으면서 거침없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처음엔 그 눈물의 연원을 알 수 없었다. 차츰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나는 그 눈물의 강줄기가 어디에서 발원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나이 발길이 닿은 적 없는 ‘민족’과 ‘역사’라는 두 말이 근원하고 있는 샘자리였다. 여기에서 민족이란 소박한 의미의 ‘우리’요, 역사 역시 그때 그곳의 ‘진실’이라 할 것이다. 안중근 공판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진실’을 알아내는 행위야말로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다.

 

‘안중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얼빈에서 한 발의 총성으로 이토의 죄악을 성토하여,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안 의사를 이어, 이제 우리가 온 몸으로, 온 정신으로 그 전쟁을 치러내야 한다.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든 우리들 자신이 이토임을 깨닫고, 각자가 ‘자신의 죄’를 성토해야 하며, 나아가 스스로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길은 본디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만인이 다니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루쉰의 말을 떠올리며, 안 의사의 ‘혼’, 안의사의 ‘정신’을 따르는 수 많은 이들의 발걸음으로 만들어지는 우리의 ‘참다리 미래’를 그려본다.

 

이기웅 선생님께서 쓰신 개정판 서문을 보면

 

“나는 안중근 정신을 ‘신독(愼獨)’, 그리고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감춘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고, 조그마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는 데서 삼간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에서 유래하는 ‘신독’이라는 말은, 안의사의 삶을 진실되게 말해준다. 그분이 남긴 ”戒愼乎其所不睹'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경계하고 삼간다.)“라는 글씨 역시, 이토 처단, 대한독립의 염원에 앞서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감추지 않으며, 그리하여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저자의 서문으로도 충분히 안중근 의사를 잘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연대기로 보는 안중근 그리고 그의 시대를 보면, 조부와 부친의 삶부터 해서 그 시기의 우리의 시대적 상황이 비교 되어 표현되었다. 안증근 의사 1세때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했고 이토는 헌법 연구를 위해 유럽으로 갔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는 삼국동맹을 했고 임오군인봉기가 있었다.

 

 

 

안의사 6세때는 박영효 등이 개화파 정변 이후, 부친 안태훈은 신천군 청계동 산중으로 이사갔고, 한문학교에

들어가 8-9년간 보통 학문을 익힌다. 이 시기 갑신정변과 독일, 마셜군도 점령하고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 내각을 성립하게 된다.

 

안의사 16세때에는 혼인을 했고 동학농민전쟁이 시발했고 간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국민회의 결성하고 청일전쟁이 반발했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안의사 28세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무를 맡아 보며 교육사업을 함, 전국 의병 봉기, 일본 관동도독부 설립, 남만주 철도회사 설립 되었다.

 

안의사 29세 국채 보상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고 이토 압력으로 이완용 내각 설립 고종의 밀사로 이상설, 이준, 이위종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 거부 당하였다.

 

안의사 30세 의병 전쟁을 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과 <대동공보> 등에 동포들을 대상으로 독립심을 고취하는 글을 투고하였다. 일본 상품 불매 운동, 한성에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되었다.

 

안의사 31세 엔치야에서 동지 열두 명과 이후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을 ‘단지동맹’으로 결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국내, 러시아령, 하와이 등지에서 수 많은 동포들이 안중근의 변보 비용을 마련하고 옥중 자서전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기유각서를 조인하고 한국의 사법 및 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게 된다. 국내 의병을 진입하기 위한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이 시작된다.

 

안의사 32세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나 항소를 포기하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서른두 해의 치열했던 생을 마감했다. 제2차 러일조약이 조인되었고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 사이에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하였고 조선 총독부가 설치되었다.

 

짧은 생애 32년을 살았지만 영원히 우리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 계실 분이다. 일본인 간수들 마저도 안중근 의사를 존경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죽음을 며칠 앞둔 안중근 의사는 동생인 정근(定根)·공근(恭根)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 장사를 지냄)하지 말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는데 아직도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뤼순 어딘가에 묻혀 있을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니 참 가슴이 아프다.

 

그렇게도 바라던 독립을 원하셨는데, 이제 독립이 되어서 기쁘실까? 아님 하나되지 못하고 둘로 나뉜 분단된 조국이라서 마음이 아프실까??

 

어느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보고 계실까??

 안중근 의사의 신독 ”감춘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고, 조그마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는 데서 삼간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