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싶은 여행지..

2010년 새해 첫날 상해에서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를 만나다.

세미가 2010. 1. 7. 13:40

 

 

2009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 중국 상해로 떠났다.

2008년 마지막 날은 국회 로텐더 홀에서 갇혀 2009년 새해를 맞이 했고

2009년 마지막 날은 중국 상해에 향했다. 그리고 2010년 첫날인 1월 1일은 상해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윤봉길 의사가 계시는 노신 공원을 가기로 했다.

 

나 아닌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상해를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아마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홍구 공원으로 더 유명한 윤봉길 의사 의거 장소일 것이다.

 

중국 상해 인민 광장역에서 내려 상해 거리를 걸었다. 새해에서 그런지 붉은 등이 나무마다 걸려 있었다. 그건 복이 오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시골에 가면 집집마다 크게 등을 달아 놓은 다고 했다.

 

임시정부 가는 길, 상해의 오랜 집들이 있었다. 그 골목은 1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우리 임시정부가 있을 때도 그 골목의 집들은 똑 같았으리라 생각했다. 아마도 우리의 독립 운동가 분들이 어딘가에서 기거 하셨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을 지나 작은 집처럼 생긴 곳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라는 글씨가 한글로 적어져 있었다.

그 곳에서 표를 끊어야 한다. 중국 돈으로 15위엔 한화로 약 2700원 정도였다.

 

임시 정부 관련 비디오를 6분 정도 상영해 주었다.

매표소를 나와 골목으로 돌아가니 임시정부 입구가 나왔다. 그곳에서 표를 내고 들어갔다.

 

 

막 들어서자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커다란 태극기였다.

태극기는 지금의 태극기처럼 찍어서 만든게 아니라 태극 모양과 건곤이감의 괘를 다 천으로 바느질 해 만든 태극기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인지 아니면 천 색이 처음부터 그랬는지 몰라도 태극 모양의 붉은 부분이 거의 분홍 빛으로 보였다.

 

 

 

 

생각보다도 아주 작은 임시정부는 총 4층으로 이루어졌다.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해서 1층을 둘러보고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김구 선생님의 집무실이었다. 밀랍 인형의 김구 선생이 앉아 계시고 일을 보는 비서 밀랍인형이 있었다. 김구 선생의 작은 책상과 비서 책상 그리고 침대 하나가 들어가니 꽉찰 정도의 작은 집무실이었고 옆 회의장도 아주 작았다. 테이블에 의자 6개 정도가 들어가니 꽉 차 보였다. 그 옆으로 돌아가니 임시정부의 여러 문서들이 액자에 걸려 있었고 임시정부 청사 미니어쳐 건물을 만들어 놓았다.

 

 

건물을 돌아 나오다 보니 임시정부청사 만들 때 기부를 해 주신 분들이 명단과 금박 모형의 액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청사 방문하신 귀빈 명단과 방명록이 보였다. 작년 우리 곁을 떠나신 김대중 대통령님과 노무현 대통령님 내외 사진과 글도 있었다. 다시 가슴 뭉클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되었으니 딱 90년 전에 우리의 선조들은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를 가지고 이 먼 땅에 와서 이 작은 공간에서 독립을 꽤 했을 김구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들을 생각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안중근 열사의 안중근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를 생각했다.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상상했던 상해 임시 정부가 눈 앞에 있었다. 아무래도 정부라는 말 때문에 조금은 더 크고 조직된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작고 초라한 느낌이어서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따로 설명을 해준 분도 없고 가끔 서 있는 분들이 사진 찍지 마세요. 라는 말만 무뚝뚝하게 해서 안타까웠다. 중간 중간 사진을 찍어도 되는 줄 알고 몇 장 사진 찍다가 혼났다.

 

중국 상해임시정부.. 드라마, 영화, 책 속에서 만났던 독립 운동의 현장을 보며 가슴 아픈 역사를 다시 실감했다.

   

그 다음 간 곳은 인민광장에서 5코스 정도의 전철을 타고 이동하면 노신공원이 나온다.

그 곳은 홍구 공원으로 유명한 윤봉길 의사 의거지였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날,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을 즉사시키는 거사를 치렀다.

 

윤 봉길 의사의 폭탄에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가 사망했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중국의 장 총통이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한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할 만큼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일제 군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이었다

 

4억의 중국인이 할 수 없었던 거사를 조선의 25세 청년이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노신 공원은 우리나라 보라매 공원처럼 일반 공원이었다. 들어가니 농산물 판매장도 열려 있고 곳곳에서 운동하는 중국인들과 마작하는 할머니들까지 그냥 평범한 공원의 한 가운데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었다. 공원은 입장료가 있었다. 이곳도 상해임시정부 입장료와 같은 15위엔이었다. 그래도 윤봉길 의사 기념관은 사진도 찍을 수 있었고 설명하는 분이 계셔서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김구 선생과 바꾸었다는 시계나, 편지, 야학에서 가르쳤던 책에 대해서도 설명을 해주었다.

 

25살의 윤봉길 의사께서 쓰신 글 중에서 丈夫出家生不還 (장부출가생불환)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유서를 써 두시고 가신 것이다. 어린 두 아들을 둔 아버지고 어머니를 모시는 아들이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죽음을 마다 하지 않았다.

 

어린 아들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25살의 아버지 윤봉길의 편지를 보면서 참 가슴이 아팠다. 함께 간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시대에 살았다면..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거사를 치루었고 12월 19일 사형 집행을 당하셨다.

 

이마 정면에 총을 맞고, 그리고 윤 의사가 예수님처럼 매달렸던 그 나무 기둥이 전시되어 있다. 윤 의사는 사형 후 쓰레기 매립장 근처에 봉분도 없이 묻혀 사람들 발에 밟히게 하는 치욕을 당했다고 하는 안내원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윤봉길 의사의 유골은 1946년 그렇게도 그리던 독립된 조국 땅에 돌아와 효창공원에 잠드셨다.

 

우리의 아픈 역사 속의 위대한 영웅들을 2010년 첫날 상해에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