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전 1월 14일 박종철 열사는 물고문을 받다가 숨졌다. 1월 13일은 박종철 열사 23주기 추도식 일이다..
예비 대학을 마치고 대학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91년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명지대학교의 강경대 열사와 스스로의 몸에 불을 붙여 군사독재에 항거했던 전남대학교의 박승희 열사의 죽음,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많이 혼란스럽고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한열 열사 노제> <강경대 열사 노제>
나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대학 1학년 내내 많이 고민하고 힘들어했다. 아마도 운동권이었던 사촌 오빠들을 통해서 어릴적부터 투쟁가를 듣고 시국에 대해서 비판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서 뭔가 대학에 가면 다를 것 같다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오면 책을 읽고 토론하고 시국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줄 알았는데 학교 후문은 술집들로 가득차 있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연세대학교의 노수석, 조선대학교의 류재을군이 시위 도중에 죽었다고 하고 선배 후배가 이유 없이 잡혀가도 궁금해 하지도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도서관에 대자보를 열심히 붙이는 학생회 학생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자보에 관심 갖지 않은 학생들이 많았다.
<코스모스가 생각나는 박승희 열사> <코스모스>
도서관 앞에는 봉지라는 작은 연못을 중심으로 구 본관과 홍도와 백도라는 도서관 그리고 학생 회관이 있었다. 그 곳 구 본관이었던 건물 옆에서 1987년 박승희 열사는 스스로 몸에 불을 붙여 군사 독재에 항거하며 분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해마다 코스모스 피는 오월이 되면 전남대학교에서는 승희 학교가 열리고 코스모스 꽃길을 만들어 승희 꽃길을 만든다. 그리고 해마다 박승희 열사 부모님을 뵐 수가 있었다.
대학 1학년 선배들 따라 갔던 구 망월동에서 박승희 열사와 강경대 열사의 묘비와 5.18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목숨을 잃었던 무명 열사들의 묘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박승희 열사가 분신하던 시기, 서울의 강경대 열사의 구타로 인한 사망, 보성의 김철수라는 고등학생의 참교육을 위한 분신 조선대생 이철규 열사의 의문사 수 많은 분신과 의문사가 있었다고 한다. 박승희 열사가 입원했던 전남대 병원에 고등학생 김철수 열사가 함께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참교육 운동을 하던 언니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강경대 열사 망월동 묘역> <이철규 열사 묘역>
강경대 열사의 운구가 서울에서 오던 날 수 많은 전경들과 학생 시민들이 대치를 하였고 그 시기에 분신한 박승희 열사가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그 소식을 접한 시민들은 더욱더 분노하고 결국은 전경들을 물리치고 강경대 열사의 운구는 망월동에 안장될 수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대학 새내기 때의 일들이 새삼 떠올랐던 이유는 ‘신경민, 클로징을 말하다.’ 읽으면서였다.
1987년 1월 14일 오전,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진상을 철저하게 숨기면서 조사 중 심장마비로 숨진 단순 사고로 축소 조작하거나 더 나아가 영영 은폐 은닉하려는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인천 지검은 1986년 6월에 일어난 부천서 권양 성고문 사건에서 형사 문귀동을 비교적 충실하게 수사했지만 단순폭행 혐의를 적용할 수밖에 없어 기소유예로 막을 내렸다. 경찰은 경찰 사기를 명분으로 내세워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주도한 권력에 매달려 검찰 수사를 하나마나한 일로 무력화 시켰다.…강민창 치안본부장은 15일 저녁 그런 여세를 몰아 “‘탁’치니 ‘억’하며 숨졌다.”고 발표했다. 이 설명은 황당한 발표로 역사에 남아 있다. … 검찰의 화장 기도는 검찰에 의해 막혔다.…서울지검 공안 1부 최환 부장 검사와 정구영 검사장의 활약이 컸다. …형사 2부 수석 안상수 검사에게 배당했다.… 안 검사는 어렵게 얻어낸 부검을 경찰의 위협을 무릅쓰고 15일 밤 원칙대로 시행한 결과, 물고문이란 움직일 수 없는 증거와 결론을 확보했다. 부검과 그 이후 과정에서는 당시 내무부 산하에 있는 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의인 황적준 박사가 집요한 상부 압력을 뿌리침으로써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대책회의는 사건의 심각성과 경찰의 읍소 그리고 절대 고문하지 않았다는 변명만을 고려했다.
현장에 처음 간 용산 병원 의사 오연상씨는 물고문 정황을 언론에 증언한데다가 경찰은 황당한 첫 발표로 국민 신뢰를 잃어버린 상태에 있었는데도 이렇게 막가는 결정이 나왔다. …경찰의 축소 조작 음모가 드러나자 경찰은 다시 권력을 동원해 검찰에게 오히려 가만히 있도록 압박하면서 수감된 두 경찰관을 상대로 거액의 돈과 채찍으로 회유하고 협박했다. 마침내 5월 18일 천주교가 축소 은폐 조작을 폭로하면서 고문치사 사건은 재점화 됐다. 이 폭로로 민심은 더 걷잡을 수 없게 돼 버렸다.
관련자들의 그 후..
박군이 숨진 지 22년 지난 오늘, 한국 사회는 많이 달라졌다. … 경찰이 박종철 씨를 물고문까지 하면서 소재를 파악하려 애썼던 사회학과 선배 박종운씨는 국회의원 보좌관을 거쳐 2004년 17대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부천에서 출마해 낙선한 뒤 현재 한나라당 경기 서부 지역 총괄본부장을 지내고 있다. 박군의 영결식장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용감하게 영정을 들었던 정치학과 후배 오현규씨는 졸업 후 부산에서 전교조 지원 일과 개인 사업을 하다가 2006년 지방 선거에서 역시 한나라당 소속으로 구의원에 당선됐다. 대공분실의 고문 현장에 가서 인공호흡을 시도했던 오연상씨는 여야로부터 집요하게 정계 입문 권유를 받았지만 이를 뿌리치고 중앙대 의대 교수로 여전히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교수는 그 뒤 경찰 총수의 압력과 폭로한 일기 공개 파문으로 국과수를 떠나 모교인 고려대 의대 법의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 <박종운 한나라당 국회의원 후보선거 유세>
제일 드라마틱하게 살아간 인물은 이 사건으로 일약 언론과 국민의 주목을 받은 안상수 검사이다. 사건 당시 안 검사는 검찰을 떠나 고향 마산에 가서 변호사 개업할 뜻을 밝혀 두고 있었다. …그는 검찰에서 마지막 경력에 해당하는 박종철 수사 검사의 후광으로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인권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중 여야 각 당으로부터 출마 제의를 받았다.… 그 뒤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두 차례를 지내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세월이 지나면서 안검사는 박군 사건의 이미지에서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인권 검사 이미지는 서울지검 지휘부의 지침에 따라 형성된 것인지 아니면 시간과 정세의 흐름에 따라 사람이 변한 것인지를 알기 어렵다.
…
22주기 하루 전날인 13일, 박군 가족마이 사찰에서 조촐하게 추도식을 가졌다. 1964년 4월에 태어난 박군은 스물셋이 되기 전에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죽었고 살이 있다면 지금 마흔 다섯을 바라보면서 어느 하늘 아래에서 자신의 가족과 중년의 삶을 살고 있으리라. 14일 저녁, 아무도 거론하거나 기억하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리는 박군의 22주기를 보내면서, 당시 현장을 가까이에서 봤던 나는 물론이고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꽤 많으리라고 생각했다.
2009-01-14 22년 전 오늘, ‘87년 6.10항쟁의 도화선이었던 박종철 군이 물고문을 받다 숨졌습니다. 그가 죽음으로 지킨 대학 선배 박종운씨와, 또 진실을 캐낸 안상수 검사는 정치에 입문했고 고문 정황을 처음으로 폭로한 오연상씨는 의사가 됐습니다. 그를 역사에 되살려낸 데는 바른 길과 진실을 추구한 신문과 재야가 있었습니다. 살아 있다면 40대 중반, 그가 지금 우리 사회와 언론을 어떻게 평가할지 오늘 문득 정말로 궁금해집니다.
박종철군 사건 이후 정확하게 22년 뒤인 2009년 1월 20일 용산 참사가 일어났다. 사건이 다르고 시대가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는 점이 있다면 그 때나 지금이나 진상과 책임에 대해 검찰이 직접 밝혀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또, 사건의 성격과 검찰 수사가 검찰로서 숨기고 싶은 사건, 특히 경찰 수뇌부 책임을 추궁해 들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박군 사건과 똑같았다. <용산 참사 노제>
1월 14일이 되면 23살의 박종철 군이 열사로 살아온 지 23년이 되는 날이다. 이제 46살의 중년의 가장으로 살아갈 중년의 박종철은 어떤 모습일까??
목숨으로 지켜낸 박종운 한나라당 총괄 본부장을 만나면 무어라 이야기 하고 싶을까? 한나라당 구의원을 지내고 있는 후배 오현규 군의원을 보면 어떤 느낌일까? 박종철 검사로 뜨게 된 안상수 검사가 이제는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내일이면 23번째 박종철 열사의 추도식이 있을 것이다. 가족들만 기억한 채로.. 그리고 지난해 1월 20일 용산 참사로 목숨을 잃었던 유가족들은 1년 동안의 눈물의 상복을 벗고 지난 9일 눈물 속에 장례식을 치루었다. 분명 세상이 두 번 이상 바뀐다는 23년이 지났지만 과거에 이한열, 박종철, 강경대, 박승희 열사가 분신을 하고 목숨을 잃고 김철수 열사가 참교육을 외치며 목숨을 잃어 갔었던 때처럼, 지금도 용산에서 불에 타 목숨을 잃고 시국 선언 전교조 사상 최대 징계가 있다는 뉴스가 들린다.
<어린 시절의 박종철 열사>
박종철, 강경대, 박승희, 이한열 열사는 지금 살아 있다면 이 나라를 보며 무엇이라고 할까?? 참교육을 꿈꾸었던 김철수 열사는 지금 교육 현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그 분들의 목숨이 헛되지 않게 나는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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