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기념회를 한다고 2주간 봉하마을 못 가다가 지난주에 갔었습니다.
노대통령 묘역 공사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제가 출판 기념회를 해도 되는 것인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더 이상 슬퍼할 수만 은 없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일하면서 봉하마을을 살피는 것이 진정 노대통령을 돕는 일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천근만근입니다. 제 도리를 다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컸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많은 분들을 보면서 힘을 얻습니다.
정말, 이광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기도 하시지만, 이 자리를 가득 메워 도망 못 가게하고, 이제 일을 부려먹으려고 모이신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한명숙, 강금원, 이강철, 안희정, 서갑원, 백원우 의원...동지를, 아비를 잃은 자식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백원우 의원은 노대통령 장례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과하라’고 주장하였다고 해서, ‘장례식 방해죄’로 기소되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더욱 단결해 노대통령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 낼 것이라는 각오가 생깁니다.
더욱이 오늘 제 출판기념회에 봉하마을 주민들이 천리길을 달려와 주셨습니다. 봉하마을 주민들에게 각별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봉하마을과 함께할 것입니다
아마 어릴 적 어떤 기억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 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들께 선보인 「이광재 이력서」에도 소개됐지만 '어느 날 부잣집에 태현실, 장욱조가 나오는 [여로]라는 드라마를 보러 갔다가 그 집에서 개를 풀어서 쫓겨나고, 누나랑 울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은 제 인생에 가장 큰 원칙을 정하게 합니다.
“가난은 죄가 아니고, 노력하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출세 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돕고 산다는 원칙을 세우게 했습니다.
또 하나는 원주로 전학을 왔을 때 봉산동에 사시던 장일순 선생을 보고 ‘한 인간이 인간의 정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 받았습니다.
어렸을 적 기억으로 생긴 원칙은 저로 하여금 대학에 가서는 야학생활을 하게 했고,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감옥도 가게 했습니다.
제 나이 23세살에 노무현 의원을 만나 비가 오나 눈이오나 만 21년을 그분 곁에 있었습니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변치 않는 의리로 함께 했습니다.
노무현 서민 대통령이 탄생했습니다. 30대에 청와대 국정상황실장도 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30대에 국회의원도 되었습니다.
정치를 선택하고서 결코 쉬운 길을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뜨겁게 살려고 했습니다.
2004년 처음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하고서는 일부러 당선이 어려운 가난한 태백-영월-평창-정선을 택했습니다.
저에겐 지역구가 표밭이 아니라 일터였습니다. 땀으로 적시려고 노력했습니다.
1년에 10만 킬로미터 이상의 거리를 자동차로 이동하며 지역구를 누볐습니다. 서울대 농생대, 38국도, 영월발전소, 리조트 등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수해 때에는 10일 이상 수재민, 자원봉사자들과 정말 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지난 7년여 의정활동을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교육’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국회의원에 당선 되고 나서 제가 졸업한 정선 예미초등학교에 갔었습니다.
한 학년에 8명에서 10명 정도 되는 작은 학교라 예산을 지원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영어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집중적인 지원을 한 결과 이제는 그조그마한 학교 아이들이 전국 영어 경진대회에서 상을 휩쓸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했고, 태백, 영월, 평창, 정선에 기숙사만 9개를 짓는 등 집중적인 노력을 하여 전국 기초자치단체 단위에서 교육에 성공한 곳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이광재가 “일 하나는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습니다. 여야를 떠나 과분한 평가도 받았습니다.
저는 일 중독증 환자 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써 놓은 일기에, “우리 아빠는 국회의원이다. 국회의원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아빠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국회의원을 또 나온다고 하니 떨어지기를 바랄 수 도 없고 참 답답하다”라고 쓴 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 말로만 하는 정치를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세상은 저에게 절체절명의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다’는 옛말처럼 깊은 구렁텅이가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정권 바뀌면 이광재 감옥간다’는 이야기는 2007년 대통령선거 때부터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대한민국 6번의 특검중 제가 두 번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국가 예산만 30억 원이 넘습니다. 조사가 곳곳에서 무자비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오늘 함께 해주신 조일현 의원님, 김원창 전 정선군수님도 저 때문에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이광재 것만 얘기하면 살려 준다’는 말을 듣고, 무료 변론에 나서는 변호사도 있었습니다.
결국 구속영장이 집행되던 그 순간부터 모든 것에 환멸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가 21년간 함께 했던 노무현 대통령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지켜드리지 못한 죄,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참 피눈물 나는 시간들이 흘러갔습니다. 영원히 정치를 떠날까도 생각했습니다.
“나 없어도 정치는 굴러간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자”라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속된 저를 위해서 강원도에서 10만 명이 넘는 분들이 서명을 해 주셨습니다.
면회를 오실 때마다 떡은 물론이고, 정선 임계 분들은 제가 나물을 좋아한다고 나물을 가지고 오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저에게 보내주신 편지들은 너무도 절절했습니다.
‘나만 지역구민들을 짝사랑한 게 아니었구나.’, ‘정치가 그렇게 황량한 것만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너를 위해 서명해주고, 찾아와 준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 갚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봉하마을에서 묘역 조성 지원을 맡아 일을 하면서, 노대통령이 돌아가신 부엉이 바위를 자주 본다는 것... 참 가슴 미어지는 일입니다.
어둠이 내리고 권양숙 여사님께 쉬시라고 인사드리고 나올 때, 그 마음은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사시던 곳에서 부엉이 바위가 보이기 때문에 돌아가시고 나서 한 번도 그 방엘 들어가지 못하시고, 조그만 지하방에서 혼자 계셔야한다는 생각을 할 때는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봉하마을에서 저를 보는 분들은 ‘이곳을 지켜주어서 고맙다.’라는 분들과, ‘국회의원 계속해야 한다’는 분, 지역구에서 저를 찾아 와서는 ‘봉하마을에만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 가난한 지역은 어떻게 하느냐’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습니다.
“저는 어찌해야 하나요?”
제가 여러분들께 선보인 또 한권의 책 [이광재 독서록]에는 미얀마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아웅산 수치여사를 소개한 글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수치여사에게가택연금의 어려움 보다 망명을 권유했습니다.
그때 수치 여사는 “진정한 어머니는 절대 아이들을 버려두지 않는다.”고 말하며, 망명을 거부합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귀양을 가고,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가서 쓴 글들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힘을 주는 여러분, 매일 주말이면 봉하마을을 찾는 수천여 명을 보면서 ‘제가 혼자가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바람을 이루어 내는 것이, 제가 진정으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련에 대해서도...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시련은 극복할 만큼 주어진다는 것,
시련은 극복하라고 다가오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련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큰 시련은 사람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는 시험이며 기회이다.’
‘큰 시련을 이기면 큰 사람이 되며, 그 시련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낙오자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개인이 패배할 수는 있어도, 이 시대를 사는 정의가 패배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제가 일하기를 바라는 여러분 곁으로 돌아오려 합니다.
봉하마을에 찾아오시는 분들, 노대통령의 뜻이 다시 피어나기를 바라는 분들과 함께 하려고 결심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식 같고, 동생 같고, 친구 같은 이광재가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다시 고향을 찾아오려고 합니다.
제게 생명을 주신 곳,
저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정치 생명을 주신 곳,
제가 핍박받을 때 저를 지켜준 여러분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부족한 저를 받아주시고, 여러분이 키운, 여러분의 아들 이광재를 받아주신다면 여러분을 믿고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희망을 만들겠습니다.
당 지도부께서 도지사 출마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찌할까요?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겠습니다.
강원도민이 보내주신,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반드시 돌려드릴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다음에 강원도는 강원도가 아니라 ‘기타’로 분류되는 이 서글픈 현실을 반드시 타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원도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쓰는 땅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리 욕심 없이, 사심 없이 판단하도록 하겠습니다.
비겁하게 처신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꿈이 있습니다.
저는 말로만 하는 정치를 끝내고 싶습니다.
제가 몸바쳐 일한 이곳이 일자리가 넘쳐나는 살기 좋은 곳, 서민들이 교육걱정 안하는 교육혁명을 이루어 낸 곳,
복지정책으로 어르신들과 서민들이 편안한 곳을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 가져왔던 그 꿈을 이제 다시 이어가려 합니다.
저는 하나 더 간절한 꿈이 있습니다.
남북이 하나 되는 평화로운 나라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경제 인구가 1억이 되는 기틀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2018년 동계올림픽은 평창과 금강산에서 남북이 함께 힘을 모아 치러내고 싶습니다.
강원도가 역사의 주역으로,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철책선 때문에 섬나라가 되어 외국을 가려면 전부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합니다.
섬나라가 아니라 육지로 대륙과 이어지는 대륙국가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기차를 타고 금강산을 지나 시베리아 땅을 건너 유럽으로 가는 그날을 만들고 싶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노대통령 묘역 공사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제가 출판 기념회를 해도 되는 것인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더 이상 슬퍼할 수만 은 없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일하면서 봉하마을을 살피는 것이 진정 노대통령을 돕는 일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천근만근입니다. 제 도리를 다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이 컸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많은 분들을 보면서 힘을 얻습니다.
정말, 이광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하기도 하시지만, 이 자리를 가득 메워 도망 못 가게하고, 이제 일을 부려먹으려고 모이신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한명숙, 강금원, 이강철, 안희정, 서갑원, 백원우 의원...동지를, 아비를 잃은 자식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백원우 의원은 노대통령 장례식장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과하라’고 주장하였다고 해서, ‘장례식 방해죄’로 기소되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음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더욱 단결해 노대통령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 낼 것이라는 각오가 생깁니다.
더욱이 오늘 제 출판기념회에 봉하마을 주민들이 천리길을 달려와 주셨습니다. 봉하마을 주민들에게 각별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봉하마을과 함께할 것입니다
아마 어릴 적 어떤 기억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 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들께 선보인 「이광재 이력서」에도 소개됐지만 '어느 날 부잣집에 태현실, 장욱조가 나오는 [여로]라는 드라마를 보러 갔다가 그 집에서 개를 풀어서 쫓겨나고, 누나랑 울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은 제 인생에 가장 큰 원칙을 정하게 합니다.
“가난은 죄가 아니고, 노력하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출세 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돕고 산다는 원칙을 세우게 했습니다.
또 하나는 원주로 전학을 왔을 때 봉산동에 사시던 장일순 선생을 보고 ‘한 인간이 인간의 정신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 받았습니다.
어렸을 적 기억으로 생긴 원칙은 저로 하여금 대학에 가서는 야학생활을 하게 했고,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감옥도 가게 했습니다.
제 나이 23세살에 노무현 의원을 만나 비가 오나 눈이오나 만 21년을 그분 곁에 있었습니다.
돈이 있으나 없으나 변치 않는 의리로 함께 했습니다.
노무현 서민 대통령이 탄생했습니다. 30대에 청와대 국정상황실장도 했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30대에 국회의원도 되었습니다.
정치를 선택하고서 결코 쉬운 길을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뜨겁게 살려고 했습니다.
2004년 처음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하고서는 일부러 당선이 어려운 가난한 태백-영월-평창-정선을 택했습니다.
저에겐 지역구가 표밭이 아니라 일터였습니다. 땀으로 적시려고 노력했습니다.
1년에 10만 킬로미터 이상의 거리를 자동차로 이동하며 지역구를 누볐습니다. 서울대 농생대, 38국도, 영월발전소, 리조트 등 일자리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수해 때에는 10일 이상 수재민, 자원봉사자들과 정말 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지난 7년여 의정활동을 돌이켜보면 무엇보다 ‘교육’에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국회의원에 당선 되고 나서 제가 졸업한 정선 예미초등학교에 갔었습니다.
한 학년에 8명에서 10명 정도 되는 작은 학교라 예산을 지원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영어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집중적인 지원을 한 결과 이제는 그조그마한 학교 아이들이 전국 영어 경진대회에서 상을 휩쓸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머리가 나쁜 것이 아니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했고, 태백, 영월, 평창, 정선에 기숙사만 9개를 짓는 등 집중적인 노력을 하여 전국 기초자치단체 단위에서 교육에 성공한 곳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이광재가 “일 하나는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습니다. 여야를 떠나 과분한 평가도 받았습니다.
저는 일 중독증 환자 인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써 놓은 일기에, “우리 아빠는 국회의원이다. 국회의원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아빠 얼굴을 볼 수가 없다. 그런데 국회의원을 또 나온다고 하니 떨어지기를 바랄 수 도 없고 참 답답하다”라고 쓴 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정 말로만 하는 정치를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세상은 저에게 절체절명의 위기로 다가왔습니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다’는 옛말처럼 깊은 구렁텅이가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정권 바뀌면 이광재 감옥간다’는 이야기는 2007년 대통령선거 때부터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대한민국 6번의 특검중 제가 두 번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국가 예산만 30억 원이 넘습니다. 조사가 곳곳에서 무자비하게 이루어 졌습니다.
오늘 함께 해주신 조일현 의원님, 김원창 전 정선군수님도 저 때문에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이광재 것만 얘기하면 살려 준다’는 말을 듣고, 무료 변론에 나서는 변호사도 있었습니다.
결국 구속영장이 집행되던 그 순간부터 모든 것에 환멸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가 21년간 함께 했던 노무현 대통령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지켜드리지 못한 죄,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참 피눈물 나는 시간들이 흘러갔습니다. 영원히 정치를 떠날까도 생각했습니다.
“나 없어도 정치는 굴러간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자”라고 마음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속된 저를 위해서 강원도에서 10만 명이 넘는 분들이 서명을 해 주셨습니다.
면회를 오실 때마다 떡은 물론이고, 정선 임계 분들은 제가 나물을 좋아한다고 나물을 가지고 오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저에게 보내주신 편지들은 너무도 절절했습니다.
‘나만 지역구민들을 짝사랑한 게 아니었구나.’, ‘정치가 그렇게 황량한 것만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너를 위해 서명해주고, 찾아와 준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 갚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봉하마을에서 묘역 조성 지원을 맡아 일을 하면서, 노대통령이 돌아가신 부엉이 바위를 자주 본다는 것... 참 가슴 미어지는 일입니다.
어둠이 내리고 권양숙 여사님께 쉬시라고 인사드리고 나올 때, 그 마음은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사시던 곳에서 부엉이 바위가 보이기 때문에 돌아가시고 나서 한 번도 그 방엘 들어가지 못하시고, 조그만 지하방에서 혼자 계셔야한다는 생각을 할 때는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봉하마을에서 저를 보는 분들은 ‘이곳을 지켜주어서 고맙다.’라는 분들과, ‘국회의원 계속해야 한다’는 분, 지역구에서 저를 찾아 와서는 ‘봉하마을에만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 가난한 지역은 어떻게 하느냐’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습니다.
“저는 어찌해야 하나요?”
제가 여러분들께 선보인 또 한권의 책 [이광재 독서록]에는 미얀마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끄는 아웅산 수치여사를 소개한 글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수치여사에게가택연금의 어려움 보다 망명을 권유했습니다.
그때 수치 여사는 “진정한 어머니는 절대 아이들을 버려두지 않는다.”고 말하며, 망명을 거부합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귀양을 가고,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가서 쓴 글들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힘을 주는 여러분, 매일 주말이면 봉하마을을 찾는 수천여 명을 보면서 ‘제가 혼자가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바람을 이루어 내는 것이, 제가 진정으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련에 대해서도...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시련은 극복할 만큼 주어진다는 것,
시련은 극복하라고 다가오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련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든다.’
‘큰 시련은 사람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는 시험이며 기회이다.’
‘큰 시련을 이기면 큰 사람이 되며, 그 시련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낙오자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개인이 패배할 수는 있어도, 이 시대를 사는 정의가 패배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제가 일하기를 바라는 여러분 곁으로 돌아오려 합니다.
봉하마을에 찾아오시는 분들, 노대통령의 뜻이 다시 피어나기를 바라는 분들과 함께 하려고 결심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식 같고, 동생 같고, 친구 같은 이광재가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다시 고향을 찾아오려고 합니다.
제게 생명을 주신 곳,
저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정치 생명을 주신 곳,
제가 핍박받을 때 저를 지켜준 여러분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부족한 저를 받아주시고, 여러분이 키운, 여러분의 아들 이광재를 받아주신다면 여러분을 믿고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희망을 만들겠습니다.
당 지도부께서 도지사 출마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찌할까요?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겠습니다.
강원도민이 보내주신,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반드시 돌려드릴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다음에 강원도는 강원도가 아니라 ‘기타’로 분류되는 이 서글픈 현실을 반드시 타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원도가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쓰는 땅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리 욕심 없이, 사심 없이 판단하도록 하겠습니다.
비겁하게 처신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꿈이 있습니다.
저는 말로만 하는 정치를 끝내고 싶습니다.
제가 몸바쳐 일한 이곳이 일자리가 넘쳐나는 살기 좋은 곳, 서민들이 교육걱정 안하는 교육혁명을 이루어 낸 곳,
복지정책으로 어르신들과 서민들이 편안한 곳을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 가져왔던 그 꿈을 이제 다시 이어가려 합니다.
저는 하나 더 간절한 꿈이 있습니다.
남북이 하나 되는 평화로운 나라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경제 인구가 1억이 되는 기틀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2018년 동계올림픽은 평창과 금강산에서 남북이 함께 힘을 모아 치러내고 싶습니다.
강원도가 역사의 주역으로,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철책선 때문에 섬나라가 되어 외국을 가려면 전부 비행기를 타고 가야 합니다.
섬나라가 아니라 육지로 대륙과 이어지는 대륙국가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기차를 타고 금강산을 지나 시베리아 땅을 건너 유럽으로 가는 그날을 만들고 싶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세상사는 희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법정스님, 초인의 의지로 이겨내시길 (0) | 2010.03.11 |
---|---|
눈 내린 3월 출근길 풍경 (0) | 2010.03.10 |
영월 만경사에서 정월 대보름 달맞이 소원을 빌었습니다. (0) | 2010.03.02 |
북녘에 연탄 천만장을 배달했습니다. (0) | 2010.02.26 |
기쁜 웃음 희소와 첫 만남..사랑이 가득한 로뎀의 집 (0) | 2010.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