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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 절망은 쌓이고

세미가 2010. 8. 19. 14:18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 절망은 쌓이고
더 이상 절망을 쌓아 둘 곳도 없다

(서프라이즈 / 이기명 / 2010-08-18)


왜 절망하느냐고 묻는다. 희망이 없으면 절망할 수밖에 없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지금 이 땅 위에는 절망이 쌓여간다.

일요일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어린 손주 새끼들 보면서 절망의 공포를 느낀다. 저것들은 앞으로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인가.

이런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는 죄책감에 절망이 쌓인다. 장관 내정자들의 명단과 그들이 저지른 온갖 못된 짓들을 보면서 국민은 절망을 느낀다. 절망을 이겨 낼 방법이 없다는데 더욱더 절망을 느낀다.

국민에게 절망을 준 인물들은 누구인가. 퇴진했지만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 나라 최고 지성이라는 정운찬을 비롯한 고위공직자들은 모두가 최고의 지식인들이다. 이들이 바로 불법의 주인공이라는 데 국민은 절망한다.

대법관 후보자가 범법자다. 도둑놈 잡는 경찰의 총수가 범법자다. 세금 걷는 사령탑인 국세청장이 범법자다. 어찌 절망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바로 이들을 임명한 대통령이 위장전입 범법자다. 절망하지 않으면 비정상이다.

정치권력의 악랄한 탄압으로 통한의 삶을 스스로 마감한 전직대통령에게 패륜의 망언을 한 조현오, 천안함 유가족의 단장의 통곡을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표현한 조현오의 짐승 같은 발언이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이런 인간을 즉시 파면하지 않는 임명권자에게 국민은 절망한다.

이명박 정권에서 장관을 하려면 거처야 하는 과정이 있다고 한다. ‘위장전입, 병역기피, 부동산투기, 탈세’는 필수전공이라고 박지원이 설파했다. 위증과 위장취업 이중국적과 자녀들에 대한 부당상속 등은 선택과목이라는 세론에 국민은 절망한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무엇을 하는가. 국민의 절망을 알기나 하는가. 한나라당 2중대라는 맞아 죽을 소리나 하고 바보 같은 ‘은평을’ 공천으로 한나라당을 살려 준 인간들이 국민을 절망케 한다. 민주당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우리를 절망케 한다.

시장통에서 떡볶이를 사먹는 대통령, 시장 할머니 목에 목도리를 감아주는 대통령의 친서민 모습과 부자에게 감세를 해 주는 이중성에 국민은 절망한다.

삼성재벌의 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를 도운 천주교 정의사회구현전국사재단의 전종훈 대표신부에게 3년씩이나 안식년을 연장한 정진석 추기경이 국민을 절망케 한다.

‘신부들의 사회참여를 막으려는 추기경의 뜻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함세웅 신부의 고백을 들으며 국민은 더욱 절망을 느낀다.

4대강 파괴를 막겠다고 까마득한 보 위에 올라가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면서 농성을 하고 있는 환경운동가들의 처절한 투쟁이 국민을 절망케 한다.

서민은 돈 몇 푼 때문에 징역을 사는데 몇백 억을 탈세한 재벌은 감옥도 가지 않고 사면되는 불평등에 절망한다. 대통령은 평등과 형평을 말하고 이것이 바로 국민을 위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데 이를 믿지 못하는 국민은 절망한다.

쪽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홀로 사망한 독거노인이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그런 쪽방에 투기를 한 이재훈 지식경제부 장관 후보부인이 우리를 절망케 한다. 다섯 번의 위장전입과 부동산 투기, 그리고 20대 딸들에게 거액의 펀드 투자를 하게 한 중진 언론인 출신의 문광부 장관 후보 신재민이 국민을 절망케 한다.

4백억 난방비 예산을 모두 깎아 추운 겨울 노인정에서 덜덜 떨 노인들이 우리를 절망하게 한다. 반면 4대강 홍보비가 4백억이라는데 절망한다. 국민 세금을 총괄하는 국세청장의 위장전입이 국민을 절망케 한다.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대한민국이 매일 36명의 사람이 목숨을 끊고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사실이 부끄럽고 길을 헤매는 청년 실업자들이 우리를 절망케 한다.

영포회는 염라대왕인가. 왜 죄도 없는 국민을 사찰해서 조국을 저주하게 만드는가. 그들에게 누가 권력을 주었는가.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검찰이 성 상납을 받아 특검을 받는 한국의 현실을 국민은 절망한다.

아아 왜 이렇게 절망할 것들이 많은가. 희망이 보이면 절망을 이긴다. 무엇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가. 사회악을 응징하고 정치권력의 비리를 폭로하는 용감한 언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도 된다.

언론의 행태를 보면 절망은 더욱 쌓인다. 조현오의 패륜적 망언을 은폐했다는 지적에 격렬하게 항의하는 KBS 기자에게 절망한다. 국민의 분노와 절망을 보지 못하는 그들의 젊은 눈에 절망한다. 정권에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줄줄이 방송에서 쫓겨난 정관용 손석희 김제동과 불랙리스트에 오르고 끊임없이 방송생명의 위협을 받는 김미화가 국민을 절망케 한다.

용산에서 불타 숨진 사람들과 천안함에서 숨진 46명의 젊은 목숨이 우리를 절망케 한다. 헬기 추락과 전투기 추락으로 숨진 우리의 아들들을 슬퍼한다. 그들의 외로운 죽음이 국민을 절망케 한다.

죽은 언론에 절망한다. 그래도 살아있을 것이라는 기자의 정의감을 기대하는 국민의 소망이 무참하게 깨진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낀다. 독재자에게는 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아부하는 언론이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던 언론의 반민주적 작태는 이제 다시 기승을 떤다.

MBC의 김재철 사장이라는 사람이 PD수첩 방송을 막았다. 법원에서도 문제가 없다는 방송을 막았다. 이유는 무엇인가. 대답하는 것조차도 부끄럽다. 문득 어려서 기르던 개가 생각난다. 내게 꼬리를 흔들며 따르던 개지만 도둑이 들면 짖을 줄 알았다.

권력의 주구라고 하면 제일 열 받는 인간들이 언론인이다. 열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니기 때문인가. 부끄러워서 화를 내는가. 똥 뀐 놈이 화를 내는 것인가.

1944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훈령을 내려 “나치 점령군과 비시 정권의 지시와 규정에 순종”했던 언론사는 모두 발행을 금지시키는 훈령을 내렸다. 그리고 <리베라시옹>과 <콩바> 등 지하신문이 부역 신문사의 시설을 통째로 접수했다.

곡필아세로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을 살해했던 친 나치 언론인에 대한 숙청은 철저하게 실행했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에 대해 “우리의 땅을 수호하고 있는 것은 독일인”이라고 아부했던 일간 <오주르뒤>의 편집인 조르주 쉬아레즈와 신문협회 회장으로 부역에 앞장섰던 일간 <누보 탕>의 발행인 ‘장 뤼셰르’ 등은 총살형에 처했다.

간신히 처벌을 면한 반민족적 언론인은 모두 언론에서 추방됐다. 언론의 중요성이 강조되면 될수록 그들의 책임 또한 더 커지는 것이며 불의한 정치권력과 손잡은 언론은 단연코 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 언론은 변하지 않는가. 독재시대 정치권력에 아부 아첨하다가 독재자들이 몰락한 후 언론은 얼마나 많은 질타를 받았던가. 특히 조중동을 비롯해 방송매체들도 사람대접을 못 받았다.

정신을 차릴 줄 알았다. 아니 사람이 될 줄 알았다. 제대로 된 언론으로 태어날 줄 알았다. 그러나 ‘도로아미타불’이었다. 왜일까.

속 터놓고 말하는 언론인과 나눈 대화다. 자신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언제나 언론을 필요로 하고 불의한 언론 역시 언제나 정치권력과 손을 잡는다는 것이다. 치사한 목숨을 연명한다는 것이다. 자신만만이다. 변신과 아부의 달인은 이제 국민을 위하는 언론이 되어야 한다. 국민들의 절망이 그들의 눈에도 분명히 보일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반민주언론처벌법’이다. 나치협력 언론인을 총살에 처했듯이 반민주행위를 하는 언론은 반드시 처단되는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정도를 가는 정론이 살고 국민은 희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

제대로 얼굴 들고 사는 언론인이 얼마나 되는가. 부끄럼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언론인이 몇 명이나 되는가. 불의한 언론인들이 국민의 신뢰를 상실함으로써 국민은 더욱 절망의 늪으로 빠진다.

장관 임명자 청문회를 앞두고 너무나 많은 허물들이 나타나자 청와대 대변인이라는 김희정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고르고 고른 인물들’이라는 망발이다. 입이 딱 벌어졌다. 국민을 희롱하겠다는 의도적 발언인가. 아니면 국민을 바보 천치로 아는 것인가.

진정 고르고 골라서 임명한 인물들이 이 지경인가. 이명박 대통령의 사람 보는 눈을 너무 우습게 폄훼하는 것이 아닌가.

쌓여가는 절망은 끝이 없고 한이 없다. 어떻게 이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 후손에게 사람 사는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절망이 차곡차곡 쌓여 더 이상 쌓일 곳이 없다면 어떻게 되는가.

너무나 두려워 차라리 생각을 덮자.

 

2010년 8월 18일
이 기 명 (전 노무현후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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