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책 그리고 인생

기적을 만든 슈바이처 신부 - 울지마 톤즈

세미가 2010. 12. 21. 17:27

 

 

 

한국의 슈바이처 이태석 신부를 그린 타큐 영화 ‘울지마 톤즈’

 

 

KBS PD와 롯데시네마의 도움으로 14일부터 31일까지 롯데시네마 전국 29개 상영관에서 조조영화로 관람할 수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태석 신부의 신문 기사를 보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내전 중인 수단에서 의사로서 신부로서 헌신해온 졸리(이태석)신부의 이야기는 감동의 눈물을 쏟아지게 했다.


그 신문 기사를 본 순간부터 조조 프로로 밖에 볼 수 없는 “울지마 톤즈”를 보기 위해 시간을 내기위해 노력했다. 지난 일요일 이른 아침, 울지마 톤즈를 보기 위해 롯데시네마 신림에 도착했다. 곧 매진이라는 글귀를 보고 급하게 표를 예매했다. 거의 자리가 없어서 극장 맨 앞자리에서 영화를 관람해야 했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영화를 볼 수 있으니..


영화 시작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꽃이 된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글귀가 나왔다. 그 글귀를 보는 순간부터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도원에서 투명중이던 이태석 신부의 눈망울은 너무나 선하고 아름다웠다.


이태석 신부는 아프리카 수단 남쪽에 위치한 딩카족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헌신적으로 돕다 지난 1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내전 속에서 200만명이 죽은 수단이라는 나라, 20여년간의 내전으로 가장 가난하고 피폐해진 곳에서 8년간 의료 봉사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이태석 신부는 톤즈 사람들에게 아버지이자 친구가 된다.


톤즈 사람들은 이태석 신부를 쫄리 신부라고 부른다. 졸리 신부는 1999년 여름, 전쟁 중이던 수단의 톤즈를 처음 왔을때, 앙상한 뼈만 남은 사람들, 전쟁으로 수족을 잃은 장애인들, 거리를 누비는 헐벗은 사람들, 한 동이의 물을 얻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아낙네들, 학교가 없어 하루종일 빈둥거리는 아디들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나, 나환자 마을에서는 단순한 인간적인 의지를 넘어 다른 차원의 특별한 어떤 것을 느꼈다고 한다.

 


작은 병에 걸려도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고 진료를 시작했다. 하루에 300명이 넘는 사람을 치료하고 아무리 밤 늦게 환자가 와도 마다하지 않고 진료를 했다. 그 다음 학교를 짓는다. “예수님이라면 예배당을 지을까? 학교를 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다”라는 말이 나온다. 진정으로 피폐한 땅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 대한 사랑으로 희망을 키워주고 싶었던 것이다.


전쟁과 가난으로 상처 받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음악을 가르친다. 졸리 신부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묵상이라는 찬송가를 직접 작사작곡 하기도 했다.


9살의 어린 아이가 총을 들어야 했던 수단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를 들면서 아이들 마음이 치유된다.

많은 재능을 지닌 분이었다. 악기 하나하나를 스스로 배워 아이들을 가르치고 브라스 밴드를 만든다. 남수단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쟁의 총성만 있던 곳에서 악단의 음악이 울려 퍼지면서 희망을 보았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바로 나를 대하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장 낮은 곳에서 낮은 자세로 함께 한다. 톤즈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외면 당한 사람들, 나병 환자들이 있는 곳이다. 손과 발이 짓무르고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신발이 없어 신을 신지 못하는 가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에게 치료할 약을 주고 짓무른 발에 맞춰 일일이 신발을 직접 제작해서 선물하기도 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감사할 줄 아는 민감한 감성을 가졌다.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해 손과 발에는 화상이나 상처가 가득하지만 감각 신경의 마비를 보완이라도 하듯 보통 사람보다 수십배나 민감한 영혼들을 지니고 있다. 자그만한 것에 기뻐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졸리 신부가 8년간 톤즈 사람들과 생활하면서 쫄리 신부는 그냥 톤즈인이 되었다. 이방인이 아니고 톤즈 사람.. 그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감동 시켰는지 모른다. 특히나, 아이들과 나환자들에 대한 사랑은 더욱더 각별했던 것 같다.


나환자 마을의 한 할머니는 졸리신부를 하느님이 보내주신 성자라고 이야기를 했다. 톤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쫄리 신부는 하느님이 보내주신 성자이고 희망이고 사랑이었을 것이다.


쫄리 신부는 어머니를 보기 위해 2년에 한번씩 휴가를 나온다. 10남매를 낳았고 삯바느질로 10남매를 키워온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10남매 중 위의 형 한분과 누나 한분이 신부와 수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어머니는 의사가 될 장래 총망 받는 아들이 의사가 되는 것을 반대했지만 결국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사제가 된 후 멀리 아프리카로 떠난 아들.. 어머니의 소원은 “꼭 5일간만 앓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래야지 아프리카에 있는 아들을 죽기 전에 볼 수 있으니..그렇지만 이렇게 아들이 먼저 갈줄은 몰랐다고 눈물 지었다.


2008년 암 선고를 받는다. 온 몸에 암 세포가 전이되었다. 수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쳤던 졸리 신부는 정작 자신의 몸 속에 퍼진 암덩어리는 알지 못했다. 암 선고를 받고서도 계속 톤즈로 가야한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고 한다. 우물을 파다 왔고 아이들이 있으니 그 곳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의사와 가족들의 만류로 다시 톤즈로 갈 수가 없었다.


암 선고를 받은 이후 일주일 만에 수단의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음악회가 열렸다. 그 음악회에서 졸리 신부는 너무나 평온하고 맑은 얼굴로 노래를 한다. 죽음을 선고 받은 사람의 얼굴이라고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얼굴을 보면서 가슴이 더 아팠다.


올해 1월 14일 결국 쫄리 신부는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그리고 두 번 다시 톤즈로 돌아갈 수 없었다. KBS 제작진이 톤즈로 향한다. 그리고 졸리 신부의 죽음을 알려준다. 브라스밴드 아이들에게 투병 생활 속의 졸리 신부의 모습과 장례식 DVD를 보여준다. 우는 것을 수치로 아는 톤즈 주민들은 눈물을 흘린다.

 

 

 

나환자 촌의 주민들에게 선물로 졸리 신부의 사진을 선물한다. 장님인 나환자 할머니께서 졸리 신부의 사진에 키스를 한다. 그리고 방 한 곳에 고이 사진을 모셔놓는다. 그립고 그리운 졸리 신부님..


졸리 신부에게 악기를 배웠단 12살 한 꼬마는 졸리 신부가 그립다고 한다. 졸리 신부가 몰래 학비를 대신 내줘서 학교를 다녔는데 이제는 학교를 다닐수도 없다. 졸리 신부님 이야기만 해도 눈물을 흘리는 그 아이는 도저히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인터뷰는 중단된다.


쫄리 신부가 없는 톤즈 마을은 병원도 브라스밴드도 모두 문을 닫았다.


한 사람이 빈 자리가 너무나 크다. 톤즈 신부의 죽음을 듣은 브라스 밴드가 스스로 늦은 밤 공연을 한다. 곡목은 “사랑해 당신을”이다.


어눌한 말투로 연주를 하고 노래하는 톤즈의 아이들.. “사랑해 당신을..사랑해 당신을 .. 정말로 사랑해.....” 눈물을 흘리며 노래는 "사랑해 당신을..“은 세상 그 어느 노래보다도 가슴 깊이 파고 드는 슬픈 노래였다. 희망과 사랑을 전해준 졸리 신부의 죽음을 믿을 수 없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가슴 깊이 다가온다.


영화 관람 90분 내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한 사람이 하나님 곁으로 너무나 일찍 가버려서 가슴 아팠다. 그 맑은 미소를 다시 볼 수 없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톤즈로 몸은 갈 수 없지만 마음만은 늘 함께 했던 졸리 신부는 톤즈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쓴 책이 있다.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라는 책이다.


아마도 쫄리 신부는 톤즈로 돌아 갈 수 없지만 많은 따뜻한 사랑이 상처받은 아이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쓴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감동의 눈물을 듬뿍 전해준 졸리 신부.. 이태석 신부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 사람의 진정어린 마음이 주는 감동과 기적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