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책 그리고 인생

노무현 대통령 -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세미가 2011. 5. 22. 20:44

5월은 참 많은 날들이 있다.


5월 초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까지... 조카들을 챙겨야 하고 부모님과 함께..그리고 선생님과 교수님을 생각나게 해주는 날들...


수 없이 많이 스러져 갔던 오월의 영령들이 생각나 가슴 아픈 5.18..

 

 


그리고..5월 23일 ..


2년전 5월 22일 금요일 밤.. 티비를 켜놓고 잤었다. 나의 꿈이었는지..티비에서 였는지..밤새 누군가가 죽었다고 이야기 했다. 누군가가 죽었다고.. 밤새 꿈속에서 시달려서였는지 너무나 피곤했다.


비몽사몽 상태로.. 누워있었는데 함께 근무하던 직원의 전화 한통..


토요일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노무현 대통령께서 서거 하셨다는 확인 전화였다. 잠이 확 깼다. 무슨 말이냐고? 뉴스에 나온다고.. 따로 들은 이야기가 없냐고 전화를 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mbc, kbs, sbs를 번갈아가면서 채널을 돌렸다. 노무현 대통령 위독으로 나오는 채널과 서거로 나오는 긴급 속보를 보았다.


 

그 순간 머리는 하해졌고..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전화는 빗발치듯이 오기 시작했다. 나도 울고 상대방도 울고.. 다들 정신이 없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친구들 마저도 그냥 울면서 전화를 했다.


그날 봉하마을로 향했다. 그곳에는 10년 전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인사를 하고 10년째 되는 날 우리를 이곳으로 다 모이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을 봉하에서 머물렀다. 서울에서 도저히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사무실 직원 그 누구도 왜 서울에 올라오지 않느냐는 말을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장을 지켰던 것처럼 일주일을 그냥 봉하 마을에서 지냈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었다. 그냥 하루 하루 마음의 아픔을 함께 치유해 가는 것 밖에 .. 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시간은 지났다. 아픔은 조금씩 치유 되어갔다. 그 아픔의 치유마저도 노무현 대통령께서 뿌려놓은 씨앗들로 인한 치유였다. 500만 명의 조문객들을 보면서 .. 소낙비가 와도 태양이 따갑게 내리쬐어도 1시간씩 조문 행렬을 지키는 사람들.. 그분들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님께서는 돌아가셨어도 돌아가신게 아니다. 저 사람들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다. 영원한 내 마음속의 대통령으로..남으시겠지..


그리고 시간이 지났고 1주년이 왔다. 1주년이 되기까지 열심히 국민 박석 모금을 했었다. 여기 저기 글도 쓰고 주위 분들께 홍보도 했다. 개인 적으로 아버지 어머니 성함으로 박석을 신청했다. 사랑합니다. 그립습니다.라는 문구로.. 떠나신 아버지와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수십년 후에 엄마가 떠난 후에라도 늘 그립고 사랑하는 분들이라는 뜻에서.. 그리고 큰오빠네 가족들 이름으로 두장.. 둘째 오빠 가족들 이름으로 한 장..언니네 가족 이름으로도 한 장.. 그리고 내 개인 이름으로 한 장..총 7장의 박석을 신청했었다.

 

 

 


1주년 행사 때 박석을 3대가 신청한 가족을 초대한다고 노무현재단에서 연락을 했었다. 그때 한참 강원도에 가 있을 때라서 1주년 행사때는 참석 하지 못했다.


어느 덧 2주기가 되었다. 2주기 때는 지난 주 아는 지인의 결혼을 봉하마을에서 하게 되어서 봉하마을에 다녀오게 되었다.


국화 한송이를 묘역 앞에 헌화하고 참배 했다. 시간이 흘러서 인지.. 이번에는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박석에 새긴 글귀들을 하나 하나 읽기도 하고 생가터를 방문하기도 하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함께해서 행복했습니다.”


봉하 쌀 막걸리도 시원하게 한잔 하고.. 봉하 찰보리떡도 선물로 받았다. 봉하쌀로 만든 것이다. 대통령께서는 떠나셨지만 고향 사람들은 살게 해 주고 떠나셨구나..저 멀리 장군차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봉하 테마식당에서는 장군차국수를 만들어 팔기도 한다.


봉하마을 주민들이 2008년 평창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평창 바람마을 주민들이 대통령님께서 2007년 평창 휴가 오신 후에 다음에 또 오신다고 하셨는데 약속을 어기셨다고 하니까.. 봉하마을 주민들께서 우리가 대신 왔다고 했었다. 봉하 마을 주민들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사랑이 각별함을 느꼈었다.


지난 일요일은 서울 미술관에서 노무현 대통령 추모 2주기 사진전과 동영상을 감상했다.

봉하마을 사저 앞에 모인 국민들 앞에서 노래하는 대통령님의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났다. 저렇게 행복해 하셨는데 조금만 더 살 수 있게 해드렸으면 좋았을텐데..


사진 전에서 선거 공보물들을 쭉 볼수 있었다.


그 중에 인상적인 글귀가 있었다.


종로 국회의원 출마 하셨을때 선거 공보물이었던 것 같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평생 자기 돈으로는 룸싸롱도 한번 못 가보고 회사의 발전이 나의 발전임을 굳게 믿으며 살다가

예고없이 잘려 버린 이 나라의 가장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남편이 기죽을까봐, 혹시 엉뚱한 마음 먹을까봐 발자국 소리도 크게 못내고

속만 타는 이 땅의 어머니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4절까지 열심히 외운 죄 밖에 없는데 갑자기 좋아하는

피아노를 못 치게 된 우리 아이들을 위해 나는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비싼 임대료에서 권리금까지 주고 시작한 장사, IMF에 한달 이익이 월세 줄 돈도 못되어

문닫으려니 전세금조차 빠지지 않는 중소상인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힘들게 비위 맞춰 받아놓은 어음은 하루 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고 생사고락을 같이해온

직원들을 다르려니 그 가족이 눈 앞에 어른거려 뭉클뭉클 극단적인 생각만 나는

우리 기업인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3당 합당을 거부하고 원칙 있는 바보가 될 때의 소신,

동서화합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해 대통령 선거에서 지역을 초월한 선거운동을 하 f때의

그 역사인식으로 돌아가는 일 이상의 그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이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종로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치인으로서 가족의 이익보다는 종로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나라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일 이상의 그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를 버리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마지막 문구가 가슴이 아팠다. 결국은 본인을 버리고.. 국민들에게 하시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5월 23일은.. 가슴 아프고 슬픈 오월의 또 하루다..